[옹기마을 산책] 우리 옹기의 역사
[옹기마을 산책] 우리 옹기의 역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2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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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어 오늘날까지 전통의 맥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그릇은 토기이고 고려시대는 청자, 조선시대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옹기를 두고 ‘어느 시대의 옹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옹기가 어느 시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도자기는 토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옹기와 같이 크게 5가지로 나뉘고, 그 기준은 사용한 흙과 유약이다. 청자, 분청사기, 백자는 미세한 분말 상태의 흙을 사용하고 토기와 옹기는 고운 모래가 섞여 있는 흙을 사용한다. 이 점이 옹기가 다른 전통 도자기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도 삼국시대의 토기도 모래가 섞인 옹기토를 사용해 숨을 쉰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로 옹기에 포함시킨다.

옹기는 흔히 서민들의 그릇이라 불린다. 궁궐이나 관료들이 사용하는 청자, 분청자기, 백자는 관에서 직접 관리하는 관요에서 제작한 반면 서민들이 사용하는 옹기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민요에서 제작되었고 그 가격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궁궐의 장독대를 만들 때는 궁중의 관리들이 민요로 직접 나와 주문한 옹기들이 완성될 때까지 관리해서 가져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궁궐과 사대부집안, 민가의 장독대는 그 규모나 품질이 확연히 달랐다.

옹기가 가장 다양하게 생산된 시기는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로, 그 시대에 만들어진 옹기들은 지금도 가장 많이 남아있다. 근대에 이르러 옹기는 품질이 확 떨어지게 된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이 옹기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을 알고 옹기공방을 연 일본인들이 대량생산을 노려 옹기 유약에다 납을 넣어 ‘납유옹기’ 즉 ‘광명단(光名丹) 옹기’를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달리 반짝거리는 광명단 옹기는 옹기 유약에 납을 첨가해서 만들었다. 보통 1천200~1천230℃에서 굽는 옹기의 유약에다 납을 섞으면 유약이 950℃ 정도에서 녹아 연료비와 시간은 물론 인건비까지 줄일 수 있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납유 옹기는 과일주스나 김치를 담아둘 경우 납이 서서히 녹아 인체에는 해롭다. 지나치게 반짝거리는 옹기는 납유 옹기로 보면 된다. 해방이 되면서 납유 옹기는 많이 사라지고 다시 질 좋은 옹기들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값이 싸다는 이유로 동남아에서 많이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나라의 도자기 역사를 현대에서는 지역을 대표하는 도자기축제에서 엿볼 수 있다. 청자는 강진 청자축제, 분청사기는 김해 분청도자기축제, 백자는 이천 도자기축제, 옹기는 울산옹기축제에서 역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울산에는 규모가 전국에서 가장 큰. 울주군의 외고산 옹기마을이 있다. 이곳은 1950년대쯤 형성되어 역사가 그다지 길지는 않으나 우리나라 최대의 옹기마을이어서 앞으로의 옹기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랜 옹기 역사는 우리나라 특유의 발효음식문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옹기토에 포함된 작은 모래알갱이가 미세한 구멍을 만들어 숨을 쉬게 해주므로 옹기 속의 음식은 서서히 발효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구멍이 너무 작아서 공기는 통과해도 수소결합체인 물분자는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옹기가 숨을 쉬는 과학적 원리이다.

삼국시대부터 무를 소금에 절여 옹기에 보관한 이후 오늘날까지 김치, 된장, 간장, 고추장, 적갈, 식초, 막걸리와 같은 발효음식은 늘 한국인의 곁에서 옹기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옹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김미옥 울산옹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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