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른자 동동 쌍화차에 담긴 추억
노른자 동동 쌍화차에 담긴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2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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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쌍화차 한잔이요.” 큰 소리로 주문하면 “계란이 동동 오빠 왔네.” 하면서 금방 알아차린다. 그렇다. 이 밀크 하우스에서는 나를 그렇게 부른다. 찌뿌듯한 몸살 기운이라도 있는 날에는,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는, 하물며 태양이 작열하는 복더위에도 이 찻집에서 쌍화차를 마신다. 오늘도 쌍화차가 그리워 찻집에 들렀다.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 넣어 주세요.” 하면 “물론이지, 단골손님이 왔는데 노른자 동동 띄워 줘야지.” 하고 대꾸한다. 오랜만에 들른 나를 보며 호들갑을 떤다. 가져온 쌍화차 위에 동동 떠있는 노른자를 휘젓기 아까워 잠시 바라본다. 보통은 티스푼으로 푸짐한 견과 건더기를 건져먹고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차와 함께 꿀꺽 삼킨다. 노른자와 실랑이하는 사이에도 차 주문은 계속된다. 몇몇 손님은 계란 노른자가 동동 떠있는 내 찻잔을 힐끗 쳐다본다. 그리곤 결국 쌍화차를 주문한다. 당장이라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모양이다.

죽도록 힘들어하며 고뇌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당시엔 절대로 빨리 지나가지 않을 듯 느껴지던 학창시절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밀크 하우스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라면 낙이었다. “직접 달여 만든 것이라 몸에 좋다.”고 하시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쌍화차를 주문하셨다. 어린 나이에도 한약 냄새를 솔솔 풍기며 계란 노른자가 동동 떠 있는 쌍화차가 무척 맛있었다.

이렇게 쌍화차의 참 맛을 알아갔기에 동료분들이 모이는 밀크 하우스도, 막무가내로 주문해 주시는 쌍화차도 결코 거부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굳이 설탕을 넣지 못하게 하며 묵묵히 뒤에 서 계시던 아버지. 당신이 보약 한 첩을 대신하여 쌍화차 한 잔으로 내 건강과 마음을 위로해 주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처음에 느꼈던 씁쓸했던 쌍화차 맛과 함께 그 후로 내 가슴 속에는 슬픔의 지문이 하나 크게 새겨졌다.

혼밥, 혼술 문화의 확산은 쫓기듯 살아가는 경쟁사회에서 개인 간 유대감이 단절돼 개인주의 성향이 더 심화될 수도 있다. 나 홀로 문화들이 넘쳐나면서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조차 흔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급변하는 서구 문화와 더불어 비싼 로얄티를 지불하고 세계 각국의 커피들이 밀려들어왔다. 거리에는 외국 브랜드 카페들이 차고 넘친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온통 전문 커피점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차는 설 자리를 잃었다.

찻집 문화가 변화무쌍하게 바뀌어가고 있는 현실에 진저리가 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한 찻집에 무심코 들어갔다. 각종 음료 이름이 가지런히 적혀있는 메뉴판을 훑어봤다. 그 곳에 수줍게 자리잡고 있는 쌍화차가 시야에 확 꽂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 넣어 주나요?” 물어봤다. 주인은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원하면 넣어 드려야죠.” 의아해하는 표정이지만 이내 상냥한 목소리로 답한다. 이후 그 집은 단골집이 되었고 내 별명은 ‘계란이 동동 오빠’가 되었다.

묵묵히 주문해 주었던 쓴 쌍화차 한 잔에서, 단번에 마실 수 없도록 뜨거웠던 쌍화차에서, 인내와 삶의 고진감래를 깨닫게 했던 아버지의 따뜻함이 정말 그립다. 다정했던 아버지로 기억하며 이제는 가슴에 묻으려 한다. 침묵하며 기다려 주었던 아버지가 그립고, 힘들었던 학창시절이 그리워 오늘도 쌍화차를 마신다. 다시 추억을 마시러 그 찻집에 간다. 이제 찻집은 내게 유(有)의미한 파라다이스다. 그 찻집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제발 커피에 치이지 말고.

이동서 (주)젬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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