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가을을 듣다
바다, 가을을 듣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24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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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다. 현악 4중주에 피아노가 더해지니 한결 안정되고 너그럽다. 어떻게 어울려질까. 노련한 콰르텟 연주자들이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길을 터주고 조성진의 피아노가 낮고 길게 물밀듯이 스며든다. 그가 첫 음을 칠 때는 팔을 동그랗게 높이 들어 올려 살며시 내려놓는 동작이 있는데 보는 이들의 숨을 참게 하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절제된 가벼운 터치의 첫 순간 싸르르 전율이 인다.

보이지 않는 선율에 ‘우아하다’라는 형용사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려한 기교 없이 절제하는 연주는 더 품위가 있다. 재작년 한국을 방문해 까다로운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꿈결같이 연주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던 벨체아 콰르텟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렸다. 물론 다른 좋은 곡들이 있었지만 나를 유혹했던 것은 브람스의 피아노 오중주 f단조 op34 마지막 곡이었다. 계절은 바야흐로 다시 가을이 시작되었고 봄부터 짬짬이 곁에 두고 읽고 있는 브람스 평전 덕분에 실연으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현악 사중주의 교과서였던 베토벤 시대의 그늘을 벗어나기 실내악에서 여러 시도를 했던 브람스가 이 곡을 처음 작곡했을 때는 두 대의 첼로가 있는 현악 6중주였다. 클라라와 요하임의 조언으로 다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바꾸었다가, 마지막 레비의 조언에 따라 피아노 오중주 곡으로 탄생된 곡이다. 1828년 슈베르트 서거 이후 이토록 아름다운 곡은 없었다는 레비의 평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변주하고 몰입하며 확인하는 브람스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유일한 피아노 오중주. 슬픔과 아름다움이 하나인 듯 차분한 4악장의 도입부에 이어 생동감 넘치는 Allegro non troppo(알레그로 논 트로포)로 화려하게 막을 내리자 여러 번의 커튼콜이 이어졌다. 스케르죠 알레그로 3악장의 힘 있는 경쾌함으로 앙코르 연주가 끝나고 홀의 꺼졌던 조명이 다시 커졌다.

이번 통영에서 나흘간 열린 ‘조성진과 친구들’ 연주회는 티켓오픈 1분 만에 표가 매진되어 여러 달 예매취소를 기다렸다가 표를 구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서울에서는 커뮤니티 모임에서 조성진의 갤러리 팬들이 버스 두 대를 직접 빌려 오갔고 그가 좋아하는 맛 집은 손님들로 붐빈다. 조성진이라는 네임 밸류도 있겠지만 통영국제음악당을 좋아하는 마니아층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세계 유수의 이름 있는 곳에서 녹음을 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녹턴 음반을 이곳에서 녹음을 했고 조성진이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향을 가진 곳으로 이곳을 꼽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마니아가 아닌 나는, 연주회도 연주회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음악당이 있는 통영이라는 지명에 더 맘이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도착한 음악당 앞 바다 위로 내리는 주홍빛 노을을 볼 수 있고, 갈매기의 반주가 초대되어 협연되는 곳, 지금은 없지만 영원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의 정신이 고스란히 머무는 곳이 아니던가.

얼마 전 기사에서 통영에 관광객이 줄고 있지만 국제음악제가 열리는 봄 시즌과 박경리 문학관은 여전히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는 아니겠지만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만들어내는 더는 특별한 것이 없는 전시성 관광 산업에 더 이상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 어디를 가나 거대한 출렁다리가 흔들거리고, 행락 철이 아니면 텅 비어 오가는 케이블카, 골목벽화 천사의 하얀 날개는 쓸쓸하게 빛바래 간다.

도시 규모는 크지만 공업도시라서 특별한 관광요소가 없었던 스페인의 빌바오에 건립된 구겐하임 미술관은, 몰락해가는 도시에 창의적인 변혁과 추진으로 세계인이 찾는 아름다운 도시로 재탄생된 좋은 사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상상력으로 창의되는 문화 예술은 시대적인 아픔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진정성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한 시대로 사라질 수 없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연주회를 마치고 나오니 밖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소리가 들리는 음악당 마당으로 나가보니 바다 위로 환한 달이 떠 있다. 채워지고 있는 것인지 기우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지만 아무렴 어때, 온달만큼이나 유난히 크고 환한 달빛이다. 여기저기서 마주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나도 덩달아 포즈를 취하고 셔터를 연신 눌러보지만 달은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예쁘다. 순간 달을 그으며 날갯짓을 하는 새무리들, 고양이 울음을 닮아 ‘괭이’라고 부르는 괭이부리갈매기는 맑고 깊은 바다 통영의 어느 한 섬이 고향이라고 하던데, 그들이었을까.

최영실 여행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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