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죽란시사를 그려보다
가을날, 죽란시사를 그려보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18 2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만든 모임이 있었다.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친목 모임이다. 여기서 죽란이란 대나무 울타리를 의미하고, 시사는 시를 쓰며 환담하는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정약용 선생은 화초(花草)와 수목(樹木)을 좋아해서 집안 정원에 여러 종류의 수목화초를 심고 철철이 피는 꽃을 감상하기를 좋아했다. 그럴 때면 벗들을 초대하여 음주와 더불어 시를 쓰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행여 오가는 벗들에 의해 꽃들이 다칠까봐 대나무 울타리를 쳤다고 해서 이 모임의 이름이 죽란시사가 된 것이다. 이 모임에도 나름 규약이 있었는데, 이게 그 유명한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구꽃이 피면 새해 첫 모임을 갖는다. / 복숭아꽃이 피면 꽃에 앉은 봄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인다. /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여름을 즐기기 위해 한 번 만난다. / 그것도 잠시, 서늘해지기 시작하여 서련지(西蓮池)에 핀 연꽃을 완상하기 위해 또 모인다. / 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면 서로 만나 얼굴을 보고 / 겨울에 들어 큰 눈이 내리면 다시 만난다. / 한 해가 기울 무렵, 분에 심어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모두 모인다.’

처음에 이 글을 읽고,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임 규약이 있다니~!” 감탄을 금치 못했었는데, 이들이 실제로 한 풍류 행위를 알고 나서는 문화적 충격이 더욱 깊었다. 그중에서 서련지 연꽃 완상 대목을 음미해 보자.

서련지(서울 서대문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없어졌다.)의 연꽃은 많기도 했지만 연꽃이 크기로도 유명했다. 죽란시사 멤버인 선비들은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모여서 배를 띄우고 연꽃 틈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는데, 그것이 바로 연꽃이 필 때 나는 소리였다. 꽃잎이 터질 때 연꽃은 청량한 미성을 내는데,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이것이 다산과 그의 친구들이 즐기던 풍류였다.

이 모임은 위와 같은 정기 모임 말고도, 다음과 같은 임시 모임, 즉 ‘번개’도 있었다.

‘누가 아들을 낳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벼슬이 높아지면 축하하기 위해 모인다. / 회원 중 수령으로 나가는 이가 있으면 만나고,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면 그 집에서 잔치를 벌인다.’

한번은 여름날, 한양 모처에서 죽란시사 벗들과 술잔을 돌리다가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올 듯하자 갑자기 벗들과 의기투합하여 세검정 계곡의 사나운 물살을 보러 가기로 한다. 빗속에 말을 타고 달리고 달려 세검정에 도착하자 계곡에선 물이 솟구치며 깜짝할 사이에 계곡이 물로 메워지고 요란한 물 부딪치는 소리에 정자가 흔들릴 정도로 장관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소낙비도 그치고, 저녁나절이 되자 지는 해가 나무에 걸려 노을 또한 장관이었다. 다산은 벗들과 술잔을 돌리며 이 장관에 대해 시를 짓고 읊조렸다고 한다.

이때의 감흥을 담은 시를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대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총정리한 문집)’에서 죽란시사 멤버들과 함께 풍류(風流 : 속되지 않고 운치 있는 일이나 또는 그렇게 노는 일)를 즐기며 쓴 시 몇 수를 찾아봤다. 다음은 죽란시사 멤버인 홍원백의 집에서 팔월한가위 모임을 가지며 쓴 시이다.

‘궁궐 성곽 멀리 찬 구름 흐르고 / 못물 속 가을 달 밝기도 하다. / 멋진 모임에 함께한 준걸들 많아 / 마음껏 마시며 풍정을 드러낸다. / (중략) / 고담준론 한창이거늘 / 종소리가 새벽을 알리다니.’

쉽게 말해서 주구장창 만났으며, 만날 때마다 시를 쓰면서 술판을 벌인 것이었다. 자고로 모임은 이래야 된다. 모임이 재미가 있어야 모여지고, 이래야 모임도 발전하게 된다. 죽란시사란 모임이 시를 읊기 위해 술을 마신건지, 혹은 술을 마시기 위해 시를 읊조린 건지, 이는 중요하지 않다. 모임이 재미있었던 것인데,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이 참으로 격조가 있다. 연꽃잎이 아침햇살에 터지는 그 미묘한 탄성을 느끼고자 하는 열정과 계곡에 급류가 넘치며 나는 굉음과 물보라를 체험하려는 기개가 모두 참신하고, 이를 시로 적어 서로 공감하는 방식이 참으로 ‘차이나는 클래스’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순간에 그 뜨겁던 여름이 가고 조석으로 꽤 선선한 가을이 됐다. 다산 선생과 벗들이었으면 벌써 가을맞이 모임도 여러 번 가졌을 텐데, 바쁜 일상만 탓하며 ‘계절맞이’를 제대로 한번 못했다. 조금 있으면 국화의 계절이다. 단풍의 계절이기도 하다. 단풍나무 그늘 아래 벗들과 살갑게 앉아, 국화주를 음미하며 국화꽃과 깊어가는 가을을 완상하는 풍류를 그려본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 대표이사·공학박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