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을 창도한 선지자 수운 최제우
동학을 창도한 선지자 수운 최제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1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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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여시바윗골을 찾았다. 오랫동안 별러왔지만 이제야 찾은 것이다. 이곳은 수운 최제우(1824-1864)의 처가 곳으로, 집안 화재로 인해 거처를 잃자 처자식을 여기에 의탁시키고 보부상을 가장하여 전국을 떠돌며 구도의 길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도 여시바윗골로 들어와서 초당을 짓고 수련을 이어갔다. 그는 이곳(중구 원유곡길 107)에 6년여를 머물렀는데, 1855년에 어떤 스님으로부터 받은 책을 통해 득도의 실마리를 얻었다. 천도교단은 이 상황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 칭하고, 이곳을 동학의 모태지로 정했다.

늦여름의 수운 유허지는 정갈하고 단정했다. 이곳은 원래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였으나 혁신도시 사이로 ‘이예로’가 개통되면서 바깥세상과 무척 가까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천도교 본부에서 세운 <천도교 교조 대신사(大神師) 수운 최제우 유허비>와 비각, 수운의 초당이 복원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고, 2015년에는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이 조성되었다. 비각 뒤의 무궁화나무 두 그루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물과 흙을 가져와 심었다고 하니 동학을 창도한 의미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운 최제우는 경주 현곡 사람이다.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의 큰형 최진흥이 7대조이나 무후로 정무공 아들이 대를 이었으니, 생가로는 정무공 후손이다. 부친이 근암 최옥(1762-1840)인데, 초계문신인 질암 최벽(1762-1812)과 교유한 선비였다. 근암이 63세에 얻은 외아들이어서 아버지의 사랑 속에 한학을 익혀 득도의 토대가 되었다. 31세(1854)까지 10년 동안 조선 8도를 유랑하며 유불선과 서학, 정감록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을 접했다. 동시에 삼정문란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참담한 삶을 목도했다.

<을묘천서>를 해독한 수운은 양산 천성산에서 두 차례에 걸쳐 49일 기도에 들어갔다. 그 후 수운은 36세(1859) 되던 해에 오랜 유랑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갔다. 수운은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네 글자를 써 붙이고, 수도에 전념한 지 6개월 만에 ‘한울님이 사람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를 깨닫게 된다. 그 날이 바로 수운 대신사가 무극대도(끝없이 훌륭한 진리)를 받은 1860년 4월 5일이다.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 끝에 도를 깨닫고, 개벽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의 교조가 된 것이다.

수운은 포덕을 시작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1863년 12월에 체포되었다. 동학도 서학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3월 10일에 좌도난정(左道亂正),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대구 경상감영에서 참수를 당했다. 이때 수운의 나이 41세로, 개벽을 소원하면서 순교했으나 1907년에 신원이 복원되었다. 그가 득도하여 포덕활동을 하기까지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한문서인 《동경대전》과 한글서인 《용담유사》가 있다. 수운 생시에 이미 동향의 제자 해월 최시형을 후계 교주로 지명하였다.

이 무렵의 세상은 서세동점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조선 침투가 시작되면서 서학(천주교)도 풍속이 다른 조선에서 파찰음을 내고 있었다. 이에 최제우는 고유 신앙인 동학을 창도했는데, 후일 천도교로 개칭했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것인데, 권력구조나 신분제, 남존여비 등을 바꾸자는 것이다. 더 가까운 현실로는 가혹한 세수와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탐관오리들을 몰아내고 제도를 개선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동학혁명(1894) 무렵에는 조선 인구의 절반이 동학을 믿고 따랐다.

수운 사후 해월 대신사는 동학을 완성 단계로 이끌었다. 포덕이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지역마다 집강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지명하였다. 무능한 조선 조정은 자국의 민중운동에 외국 군대를 진압군으로 내세워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접주들이 이끄는 농민군을 도륙하였다. 이후 변절과 분열을 거듭하던 동학은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실권을 잡으면서 천도교로 개칭하고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언양 3·1만세운동도 상북면의 천도교인들이 이끌었다. 이처럼 동학이 우리 역사에서 남긴 자취는 크지만 지금도 숱한 사람들이 개벽을 꿈꿔야 하는 세상이다.

현곡의 ‘용담정’은 천도교 최고의 성지이다.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얻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용담정은 중건과 퇴락을 거듭하다가 경주국립공원에 편입(1974)된 것을 계기로 천도교인들이 성금을 모아 1975년 10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준공했다. 40여 년 전 그곳을 찾았을 때의 기억들이 아직도 선연하다. 이 가을, 나는 다시 용담계곡 일대의 성지를 찾아 위대한 사상가요, 선지자인 인간 최제우를 우러르고 싶다.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아직 걸음해보지 않았다면 그곳의 수운대신사를 만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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