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人소설가 눈에 비친 장생포 사람들
日人소설가 눈에 비친 장생포 사람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0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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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글이 미국인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1884~1960)’의 장생포 방문기였다면 이번 주 글은 일본인 소설가 ‘에미 스이인’(江見水蔭, 1869~1934)의 울산 견문록이다. 이 역시 지난달 30일 울산박물관에서 열린 ‘대곡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에 실린 허영란 교수(울산대 역사문화학과)의 논문이 그 바탕이다.

<실지탐험포경선>(일명 ‘포경선’)의 저자이자 <가토 기요마사>(소년문학총서)의 집필자이기도 한 에미가 울산 장생포 땅을 밟은 시점은 1906년 4월 16일. 그는 그 해 1월 도쿄에서 ‘포경 시찰’ 제안을 받고 동양어업주식회사의 포경기지(출장소)가 있는 장생포항을 찾는다. 1906년 4월 중순이라면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11.17)을 강제로 맺은 지 불과 5개월 후의 일. 식민지배 국민 에미의 거드름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허 교수에 따르면 <포경선>은 에미가 1906년 4월 16일부터 5월 3일까지 울산 장생포 포경기지의 조업 상황을 몸소 체험하고 정리한 기록이다. 에미는 포경선 ‘니콜라이 호’의 고래잡이꾼들이 고래를 잡는 장면부터 잡은 고래를 운반하고 해체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허 교수는 이 책을 ‘1900년경에 시작된 장생포 포경업의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 자료’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울산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한 에미의 비뚤어진 시각을 예리하게 해부한다.

“사람의 무리는 모두 토착민들로 저마다 손에 도끼를 들고 흰색 목재를 깎고 있었다. 흰색 목재라 본 것은 고래의 뼈였다. 비료로 일본에 보낼 때까지는 저곳에 쌓아두는데, 조선인들이 든 도끼는 이미 썩어 문드러져 뼈에 겨우 조금 붙어있는 살점을 식용으로 먹기 위해 깎아내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내가 조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미가 남긴 <포경선>의 한 대목이다. 허 교수의 평가가 이어진다. “그에게 조선을 실감나게 해 준 것은 도끼를 들고 고래 뼈에 붙어있는, 가난하고 불결한 사람들의 무리였다. 이런 태도는 통역을 맡고 있는 조선인이나 장생포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에미의 <포경선>에는 그가 가까이서 접했던 조선인 몇몇이 실명과 함께 등장한다. 28살 먹은 일본어 통역 신성삼도 그 중의 한 사람. 에미는 신성삼의 초가집 내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방바닥은 온돌인데 그 불결함은… 돼지우리에 손을 약간 댔다고 보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가난하지는 않았다.” 허 교수는 신성삼이 가난하지 않았던 이유도 설명한다. “통역을 해주는 대가로 고래 뼈에 붙은 고기를 독점해서 팔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에미는 장생포마을 건너편의 조선인마을도 배를 타고 건너가 둘러보고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상륙하자 또 다른 종류의 악취…. 너무나 불결한 조선인 가옥 100호 정도가 불규칙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보면 솔직한 장면묘사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인 앤드류스가 귀신고래 전신골격의 뼈에 붙은 살점을 떼어 가곤 하던 조선인들을 겁주기 위해 몰래 총을 쏘아대던 짓이나 에미가 고래 뼈에 붙은 살점에 집착하는 조선인들을 미개인쯤으로 낮잡아본 짓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실로 분통 터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에미의 <포경선>에 대한 이야기는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이 2009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지역 어느 일간지에 반년 가까이 소상하게 연재한 적이 있다. 신 관장은 연재를 마치는 시점, 맺음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시의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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