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신사의 품격 - 남자, 40대를 말하다
[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신사의 품격 - 남자, 40대를 말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0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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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남자, 혹은 수컷에 대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왜? 내가 남자, 혹은 수컷이니까. 사실 40대를 불혹(不惑), 즉 혹하지 않는 나이라고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40대라는 나이가 보통 그렇다. 그 나이가 되면 소싯적 꿈이나 목표와는 이젠 많이 멀어진 상태가 된다.

어차피 그 나이에 소싯적 꿈이나 목표를 이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한 줌 뿐,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간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혹은 갔다 왔든. 그러다 보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은 잘 없게 된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우니까. 40대가 되면 사는 재미도 많이 줄어든다.

경험이 쌓일 만큼 쌓였기 때문인데 고통보다는 행복이 더 문제다. 고통에는 면역이 잘 안 생기지만 행복에는 면역이 생기기 때문. 우린 모두 고통은 단 1g(그램)에도 몸서리치지만 행복은 1t(톤)을 가져도 늘 부족해한다. 어릴 적에는 크리스마스만 다가와도, 아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행복했지만 지금은 부와 명예를 얻게 되는 성공이나 쾌락 같은 게 아니면 쉬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40대가 되면 삶에 노련해지는 장점도 있다. 경험이 쌓이면서 매일 접하는 일상과 세상살이에 익숙해진 탓인데 특히 고통 앞에서 가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유까지 생긴다. 해서 40대가 되면 낭만을 알게 된다. 삶을 좀 더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되면서 가끔은 행복의 수위를 스스로 낮추는 기지도 발휘한다.

사실 이 지점에서 40대의 남자는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행복의 수위를 낮춰 낭만을 찾는 사람과 낭만보다는 목표가 아직 더 소중한 사람. 어느 쪽이 낫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전자의 경우는 그도 결국 목표를 이루려다 안 된 탓이 크고, 후자는 마흔이 넘도록 주변과 아래는 볼 줄 모르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40대에 대한 단상은 대략 이렇다.

대한민국 40대 남자들의 이야기를 깨알같이 진솔하게 그리고 있는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방영된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본방 당시에는 띄엄띄엄 봤다가 최근에 정주행으로 다시 보게 됐는데 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이렇게 끄적이게 됐다. 본방 당시 난 30대 후반이었고, 매회 시작과 동시에 나왔던 우정 충만한 깨알 방정 에피소드들이 좋아 그것만 골라봤었다. 거기엔 숨겨진 수컷의 본능이 있었고, 스타크래프트와 임요환이 있었고, 전지현도 있었고,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도 있었다. 또 로봇태권브이와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 다시 봤더니 이 드라마, 40대의 남자 혹은 수컷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담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더라. 다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도진(장동건), 태산(김수로), 윤(김민종), 정록(이종혁) 네 명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우리 사회 중산층이라는 설정에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대한민국 40대 남자들의 고민과 삶을 나름 진솔하게 잘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네 친구들이 처한 각자의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데 잘생기고 멋있으면서 자유연애주의자인 도진을 비롯해 일이건 사랑이건 화끈하게 밀어붙이는 태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된 비교적 차분한 성격의 윤, 돈 많은 아내 만났지만 바람기 충만한 정록까지. 겹치는 캐릭터 없이 대한민국 40대 남자의 유형을 나름 다양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멜로드라마인 만큼 역시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그들의 솔직담백한 연애담이었다. 진심을 다해 선물한 구두를 이수(김하늘)가 모욕하자 화가 난 도진은 이수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비로소 자신도 도진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수는 도진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런 이수를 향해 도진은 회식 자리에서 귓속말로 이렇게 말한다. “끼부리지마. 나랑 잘 거 아니면.”

비록 그 전까지는 여러 여자를 가볍게 만나고 다녔지만 도진은 이수만큼은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멘트를 날릴 수 있었던 건 40대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할 거 다 해본 40대 남자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섞는 것 따윈 이젠 별 것도 아니기 마련. 잠자리도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식일 뿐이고, 40대가 되면 사랑을 담는 그릇도 좀 더 커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인적으로 느끼는 한 가지 분명한 건 40대인 지금이 10대나 20대, 30대 때보다는 좀 더 행복하다는 것. 노안까지 왔으면서 왜 그렇냐고 묻는다면 그 전까지는 몰랐는데 40대가 되니 시간이란 게 만져지는 것 같다.

때마침 마지막회에서 도진도 이런 독백을 하더라. “소년은 철들지 않는다. 다만 나이들뿐이다. 하지만 나이든 소년들은 안다. 다른 초침으로 흐르고, 다른 색으로 빛나는 방법을.” 확실히 40대는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나이는 아닌 듯하다. 가끔은 천천히 걸으며 바람도 느끼고 따스한 햇살에 미소도 지을 줄 아는 그런 나이가 아닐까.

2012년 8월12일 방영종료. 20부작.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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