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항, 외교교섭 담당하던 신라 최초의‘외항’”
“울산항, 외교교섭 담당하던 신라 최초의‘외항’”
  • 김보은
  • 승인 2019.09.01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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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박물관 학술회의서 김창석 강원대 교수 주장처용 실존 인물 아닌 ‘전설’이라는 의견도 제기돼

울산항이 신라의 행정적 통제를 받으며 외교 교섭이나 대외교역 등을 담당하던 첫 ‘외항(外港)’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처용’이 실존인물이 아닌 풍습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전설’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김창석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지난달 30일 ‘대외교류를 통해 본 울산’을 주제로 열린 울산대곡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김창석 교수는 울산 반구동 유적에서 확인된 접안 시설과 부속 건물지 등에 단서를 얻어 고대 울산항의 위치와 기능 등을 연구했다.

반구동 유적은 태화강과 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울산의 중심 항구로 기능했던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에 따르면 ‘우시산국(于尸山國)’이 후에 신라로 발전하는 ‘사로국’에 복속된 이후 신라는 ‘율포(栗浦)’라는 ‘외항’을 확보하게 됐다.

외항은 어민들이 배를 정착하거나 조세를 운송하는 중간 기착지로 이용되던 ‘내항(內港)’과는 달리 국가 대외활동의 창구 역할을 했다.

또 신라는 율포 인근에 출입국 수속, 인사 접대 등을 위해 ‘굴헐역(屈歇驛)’을 설치해 행정적으로 통제했다. 이는 ‘삼국유사’ 지리지에 눌지마립간 때 박제상이 ‘율포’에서 왜(倭)로 출항했고 미사흔이 귀국할 때 ‘굴헐역’에서 백관을 영접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율포는 반구동 유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율포와 굴헐역 모두 현재의 울산만 일대에 있었다고 추정된다”며 “박제상이 왕명을 받아 출항한 곳이고 일종의 영접기구가 설치돼 있어 자료상 확인되는 최초의 신라 ‘외항’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단순히 외부의 이방인이 도래하거나 주민이 바다를 통해 외국으로 유출되는 곳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개입해 특정한 항구를 대외용으로 지정·설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율포의 주 이용자는 ‘왜’ 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관련해 토론자로 나선 선석열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울산에서 출발하는 교류집단이 왜나 중국으로 갈 때 일정한 역할을 한 점을 보면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남해를 경유하는 대중교류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첨언했다.

지방 호족, 이슬람 상인 등 그 실체를 두고 역사학계에서 갖가지 설이 존재하는 ‘처용’에 대해서는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봤다.

그는 “처용을 역사 속의 실존 인물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고 여러 시기의 경험과 모티브, 은유가 구사됐다”며 “처용 형상을 게시함으로써 역병을 예방한다는 의료 풍습의 유래와 기원을 설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구역 풍습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동해용, 헌강왕, 역신, 혼외 간음 등 다양한 요소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특히 처용이 역신(疫神)을 물리친 점에서 “신라 경문왕대인 867~873년 7년 사이에 세 번이나 역질(疫疾)이 일어났다. 9세기 후반 도래한 무슬림 상인들이 희귀한 약재를 공급함으로써 역병 구제에 기여했을 것”이라며 “9세기 후반 신라에 진출한 무슬림의 존재와 활동상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김창석 교수 외에도 전문가들의 주제 발표가 있었다. 이창희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의 ‘선·원사시대 울산의 대외교류’, 신종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홍보과장의 ‘고려시대 울산지역의 해상활동’, 우인수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의 ‘조선 전기 울산의 대외교류’,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근대 울산, 혼종적 장소의 두 얼굴’ 등이 이뤄졌다.

김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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