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생각하다 下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생각하다 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2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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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벨상 수상자와 액자의 비밀


동상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독일의 날씨는 쨍하다가도 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리는 다소 변덕스러운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교수님은 대학 본관 안으로 이동한 뒤 이 대학과 관련한 유명 인사들을 소개하신다.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새겨진 마르크스의 흔적을 느끼며 사진을 찍고 난 후 이 대학에서 배출한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업적을 전시해 놓은 자료를 보고 질문거리를 생각해 오라는 과제를 던져주신다. 2층으로 올라가니 훔볼트대학교가 배출한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28개 얼굴사진과 관련 내용이 적힌 액자가 벽 전체에 빼곡하게 걸려 있다.


그런데 하나의 액자에는 사진이 사라지고 관련 내용만 독일어로 장황하게 적혀 있다. 질문할 새도 없이 교수님은 얼른 올라와서 사연을 설명해 주신다. 그 수상자는 나치에 협력한 내용이 밝혀져 이 대학 학생들의 강한 반대와 토론의 과정에서 결국 얼굴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로서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걸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독일인들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어떤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대화와 토론, 공론의 과정을 통해 비판하고 수렴하는 절차를 통해서 결정하는 민주시민의 역량을 이처럼 사진 하나, 글귀 하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에 부역한 자를 끝까지 추적하고 철저히 반성하는 모습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비슷한 상황의 우리나라와 일본의 모습을 떠올려 본 시간이었다.

4. 독일판 분서의 현장을 가다

훔볼트대학의 본관을 나와 맞은편 도로를 건너면 대학의 또 다른 건물들이 베벨 광장을 둘러싸고 웅장하게 서 있다. 드넓은 광장 주변으로는 현재 법대 건물로 쓰고 있다는 고풍스런 건물과 도서관, 교회의 돔이 둘러싸고 있다. 넓은 베벨 광장의 한복판에는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작은 기념물이 있다. 몇몇 사람들이 모여 유리 안을 바라보고 있는데 언뜻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평한 유리 표면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교수님의 설명이 이어지는 순간 이 곳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 1933년에 번뜩이던 광란의 현장이고, 시대의 소용돌이를 간직한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1933년 5월 10일 밤, 베벨 광장에서 2만여 권의 책이 불태워지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에리히 케스트너 등 유대인이거나 나치에 비판적인 유명 저자들의 책이었다. 이는 그 당시 나치즘에 경도된 독일대학생총연합이 치밀하게 준비해 벌인 만행으로, 수많은 대학생들이 ‘더러운 정신을 박멸하자’는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선동에 정치, 철학, 문학, 교육, 예술을 총망라한 각 분야의 숱한 저서들을 불태운 참담한 사건의 현장이었다. 불타고 있는 책더미를 에워싸고 환호성을 지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대학생들이 나치에 협력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공범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독일 통일 후 반문명적인 분서 행위에 대한 반성은 사건 60주년을 맞아 1995년 ‘도서관’이 만들어지면서 구체화됐다. 가로 120㎝, 세로 120㎝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면 텅 빈 듯한 공간 안쪽 사방에 빈 책장이 있다.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은 빈 서가는 지성인의 사회적 책무를 성찰하게 만드는 상징물이다. 텅 빈 책장을 만들어 설치함으로써 인간의 사고가 멈추었음을,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아래에 둔 것은 지성이 짓밟혔음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아픈 현대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로 책 한 권 없는데도 이름은 역설적이게 ‘도서관’이다. 어떤 역사를 새기기 위해 조성됐는지 돌아보면 조형물의 독특한 모양새에 귀 기울이게 된다. 기념물 옆에는 그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귀가 청동판에 새겨져 목덜미를 서늘하게 한다. ‘이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책을 불태운 사람은 결국 사람도 불태울 것이다.’ 이 글은 곧 나치의 만행으로 머지않아 실현하게 된다.

사람들은 유리창을 들여다보며 시대를 돌아보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삶을 성찰한다. 편견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배척하는 게 얼마나 반문화적인 일인가를 웬만한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멀리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조형물을 통해 베를린은 그렇게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의 교훈을 새긴다. 베를린 훔볼트대학에 새겨져 있는 자유와 평화의 추억 이면에 숨겨진 편견과 억압의 역사, 광기와 몰이성의 역사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인간 존중과 다름에 대한 이해, 평등한 인류애의 실천, 끝없는 반성과 비판정신을 담아 모두가 함께 빛나는 태양 아래 손을 잡고 더불어 살아갈 날을 기대해 본다.



김선이 화진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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