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 박상진 의사를 다시 조명하다
고헌 박상진 의사를 다시 조명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2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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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 박상진(1884-1921) 의사를 다시 조명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상헌 의원이 국회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마련한 토론회였다. 이 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그날 함께 당선된 북구 관내 시의원과 구의원을 대동하고 고헌 생가를 찾았다. 그리고 곧바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최우선 과제로 고헌 의사 서훈등급 상향조정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또 고헌 생가를 중심으로 역사공원 내 동상을 비롯한 각종 조형물이 총체적 부실로 지적되자 LH공사에 재시공을 요구할 만큼 고헌 의사를 존숭하는 마음이 각별하다.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날마다 수많은 토론회가 열린다. 이에 이 의원은 고헌 의사가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포스터에 ‘울산 독립운동가’로 표기했는데, 혹자는 이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서훈 승격에 관한 토론회로 생각했는데, 막상 토론회가 공적 재조명으로 제한되자 적이 실망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필자 또한 그런 기분이 없지 않았지만 서훈 등급만으로 공적을 평가할 수 없거니와 의사의 공적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는 데 문제가 있는 만큼 생가 인근에 들어서는 역명은 반드시 ‘박상진역’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헌 의사는 구체적이지 않다. 대개 판사 임용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친일 부호들을 처단했다는 정도는 안다. 해방 이후 장승원을 처단했다는 이유로 실력자였던 그의 아들 장택상 때문에 서훈 등급을 낮게 받았다는 세간의 평가도 존재한다. 아마도 이상헌 의원은 이번 토론회를 통하여 동료 국회의원들에게 고헌 의사를 널리 알리고, 또 다른 공적으로라도 최상위 서훈을 받게 하고 싶다는 여망을 담았을 것이다. 독립운동이 아닌 다른 공적으로 상위등급 훈장을 받은 류관순 열사처럼 박상진 의사도 그랬으면 좋겠다.

고헌의 공적 재조명을 위한 토론회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발제자인 이성우 교수는 고헌의 독립운동과 역사적 의의를 축약하여 설명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인 좌장 신주백은 해박함과 노련함으로 토론을 주도했다. 박민영 독립기념관 연구위원과 이현주 보훈처 학예연구관, 역사칼럼니스트 권경률도 고헌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에서 일제와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광복회를 결사하고 총사령을 맡는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불가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구한말의 의병 무장투쟁은 만 15년 동안 진행되었다. 신돌석, 홍범도 등의 일부 승리가 있었지만 거의가 연전연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박상진은 스승 허위를 따라 상경하여 정치와 병학을 배웠다. 다시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과 경제를 공부했다. 그가 공부하던 시기에 스승은 관직을 수행하면서도 13도 창의군을 지휘하며 서울 진공작전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1908년 10월에 5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1909년 10월의 안중근 의사 의거는 의병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독립전쟁의 긴 여정을 예고하였다.

그러니까 의병전쟁에서 독립전쟁의 맥을 이은 사람이 바로 고헌 박상진이다. 고헌의 삶은 스승인 왕산(=허위)의 삶과 무척 닮아있다. 사제관계란 때로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극적일 수 있듯이 왕산과 고헌의 관계가 그러했다. 스승은 대한제국 사법부의 최고 자리에 올랐으나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는 데 자신을 던졌다. 제자의 삶도 그러했다. 상경하여 법률 공부를 한 것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발령까지 받았으나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한 것도 모두 스승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고헌은 한일강제합병 이후 국내는 물론 중국 일대를 돌아보았다. 서간도에 가서는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하여 신흥무관학교 지원 등을 상의했다. 고헌은 만주 방문 이후 안동여관과 상덕태상회를 운영했다. 채기중, 김한종 등과 ‘광복회’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총사령을 맡았다. ‘광복회’의 투쟁 강령은 ‘무력 준비, 무관 양성, 군인 양성, 무기 구입, 무력전’ 등이다. 이를 이행하기 위한 ‘비밀, 폭동, 암살’ 등의 방략도 수립했다. 부호들의 의연금은 물론 우편마차 세금 탈취 등을 수행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광복회’가 전개한 의협 투쟁은 민족의식을 각성시켰다. 3·1운동 촉발에 기여했고, 1920년대 의열투쟁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부사령 김좌진을 통해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졌으며,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이 ‘광복회’ 정신을 이어받았다. 고헌의 절의와 개방, 통합과 통찰, 용기와 초월정신 등은 해방이 될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계승하면서 독립운동 전체를 관통했다. 최근 ‘반일 종족주의’를 운운하는 자기혐오에 빠진 무리들이 고헌 의사를 비롯한 안중근, 윤봉길, 왕산, 백범 같은 어른 앞에서도 과연 입을 나불거릴지 모르겠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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