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생각하다 上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생각하다 上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27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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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도착 첫날, 책 속에서만 보던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의 다양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번화가를 걸으며 서서히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현대 독일의 모습과 첫 만남을 가졌다. 오전이 곳곳에 펼쳐진 나치의 만행과 더불어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어주는 다양한 추모의 기념물과 현장을 만나보는 시간이었다면 오후는 훔볼트대학을 중심으로 주변의 비이성적이고 반민주적인 역사적 장면을 돌아보며 참된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베를린은 곳곳이 기념관과 박물관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흔적이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시민들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을 통해 독일의 명암을 보여주는 사건과 사연을 통해 민주시민교육을 다시 생각해 본다. 자유로운 학문과 지성의 공간인 대학교에서 어떻게 20세기 세계사의 반문화적, 비이성적인 장면이 나오게 되었는지 강하게 가슴속을 누르는 불편한 진실을 직접 밟아보고자 한다.

번화가 중심에 우뚝 선 프리드리히 2세의 동상에는 자유와 학문의 도시를 갈망한 왕의 바람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베를린 훔볼트대학과 관련된 사연은 왕의 바람을 저버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 있었다.

1. 훔볼트대학의 설립과 역사

오랜 시간 독일에서 공부와 연구를 해오신 가이드 이동기 교수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지치지 않는 해박한 지식과 역사적 안목으로 베를린 구석구석 가득한 역사의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 강의를 길에서 듣는 즐거움이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여기에서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을 중심으로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한 장면을 찾아가보려 한다. 자, 그러면 모두 베를린 훔볼트대학으로 가보도록 하자.

유럽의 건물들이 그러하듯 베를린 훔볼트대학도 궁궐 같은 고풍스럽고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학교의 설립자인 훔볼트 형제의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대학의 정문에서 당시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건 어머니들의 조기 교육과 아낌없는 막대한 투자의 결과로 나타난 자녀들의 성공신화는 국적을 불문하고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베를린 훔볼트대학교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대학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로이센 왕국의 자유주의적 교육개혁가이자 언어학자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19867~1835)에 의해 1810년 베를린대학교로 창립되었으며, 그가 구상한 이 대학의 모습은 다른 유럽과 서방 대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간 정치적 변화로 인해 대학의 이름이 여러 번 바뀌기도 했지만 1949년 창립자 빌헬름 폰 훔볼트와 그의 동생인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1869~1859)를 기념하여 베를린 훔볼트대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여성에 가해진 편견과 고통의 흔적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건물 앞에는 중고 책들을 죽 늘어놓고 팔고 있는 벼룩시장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대학 안에서 학생들이 사용하던 책을 저렴한 가격에 사고파는 일이 색다르게 보인다.

본관 정원에는 대학 졸업자 중 유명한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정원 한 켠에 세워진 자그마한 여성의 모습에 눈길이 갔다. 다른 동상이 하얀색 돌로 세워진 것과 달리 까만색 철구조물로 만들어진 다소 왜소한 모습의 이 동상은 ‘리제 마이트너’란 유명한 물리학자의 동상이라고 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당시 받은 편견과 어려움은 동상의 크기에서 드러나듯 작고 위축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1890년대 여성에게 대학의 문은 재능과 상관없이 높고도 높았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늦은 나이에 대학 진학을 하면서부터 리제 마이트너는 여성에 대한 거대한 편견과 맞닥뜨려야 했다. 연구소에 여성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지하 목공실에서 연구를 해야 했고, 화장실이 없어 필요할 때마다 길 건너편의 식당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연구 동료 오토 한의 연구원이라고 불리며 동등한 능력을 가진 남자 동료들이 모두 정교수가 된 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교수로 임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너무나 늦게 교수가 되었지만 결국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나치에 의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스웨덴으로 도망쳐야 했다. 함께 연구한 오토 한이 노벨상을 받을 때 자신은 충분한 업적이 있음에도 여자이자 유대인이란 이유로 배제되었지만 그는 평생 자존심과 개인적 감정보다 그 순간에 몰두하고 있던 연구과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위대한 과학자로,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물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소신을 변함없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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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이 화진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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