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박재에 좌정한 전화앵 할머니에 대한 사랑
열박재에 좌정한 전화앵 할머니에 대한 사랑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2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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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박재에 좌정한 전화앵 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열박령은 활천리~미호리 사이의 좁고 긴 고개다. 신라시대에는 좁고 긴 고개를 ‘열박고개’라 불렀다. 가늘고 긴 장구채를 ‘열채’라 부르는 것과 같다. 구태여 한자 기록으로 남기려 하다 보니 열박령(悅朴嶺)이 되었다. 후대 사람들이 설(說)에 설(說)을 더하고, 주장에 주장을 더하다보니 설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본질을 찾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2018년 10월 7일(수), 아침 일찍 경북 영천시 북안면 상리의 염색전문가를 찾아갔다가 귀가하던 길이었다. 오후 3시30분경,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전화앵(?花鶯) 묘에 도착했다. 봉계지역을 찾으면 늘 그랬듯이 전화앵 묘를 둘러보았다. 2002년 ‘전화앵 예술제’(울산학춤보존회 주관·주최)를 처음 시작한 이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묘 앞 도로에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다. 살펴보니 전화앵 묘에서 두 사람이 합장한 채 예배를 하고 있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황급히 묘를 찾았다. 수인사를 하고 난 뒤 여차저차 사연을 들었다. 스스로 신분을 밝힌 그들은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반드시 찾아 예배를 올리고 간다고 했다. 대학에서 풍수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수와 제자 사이라는 그들은 전화앵 묘터가 풍수학적으로 좋은 명당이라고 했다.

2019년 7월 25일, 통도사 방장 중봉 성파스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일전에 부탁드린 글을 써놓았으니 찾아가라는 말씀이었다. ‘東都妓?花鶯’ 여섯 자를 의미 있게 받았다. 기쁜 마음에 곧바로 표구사로 달려갔다. 은은하게 배접된 족자(簇子)를 가슴에 품고 가선(歌扇)과 무삼(舞衫)을 되뇌며 토굴로 돌아왔다. 전화앵 위패를 모셔둔 울산학춤보존회 전수관 벽에 정중하게 거니 참 보기가 좋았다. 때때로 찾고 일부러도 찾는데 볼 때마다 자긍심(自矜心)이 느껴진다. 올해 전화앵 예술제에 선보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고 그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는 심정이다.

2019년 8월 11일(일, 말복) 오후 3시40분경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전화앵 묘에 도착했다. 경기도 고양시의 부부, 울산 남구와 경기도 양주에 사는 분, 경남 밀양시의 내외와 필자를 합쳐 모두 일곱 명이 찾았다. 전화앵 묘는 놀랍게도 깨끗했다. 한 번씩 찾아가면 풀이 무성하던 기억뿐인데 봉분의 풀도 주변의 풀도 말끔하게 벌초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진 주먹만한 돌멩이를 주워 처리하고는 자리를 깔고 수박, 배, 전, 포도, 막걸리 등 십여 가지 제물을 차렸다. 향을 사르고 참배를 했다. 참배객들은 같은 말을 했다. 신라시대 여성예술인을 기생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도록 하면 될 것인데 왜 못 하느냐고 필자에게 따지듯 반문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음복하면서 들려주었다. 다음날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두서면사무소 등 몇 군데에 수소문을 해도 누가 벌초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2019년 8월 18일(일, 오후 4시∼7시), 활천이 고향인 최해기(崔海基.1905∼1960)씨의 자식을 모임에서 만났다. 날짜를 정해 찾아가 셋째 딸 최남학(1937년생), 넷째 딸 최말순(1951년생) 자매가 들려준 전화앵에 대한 구전을 기록했다.

“기생이라도 유명한 기생이라는 말을 우리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요. 동네 어른들이 기생 무덤은 한해도 묵히면 안 된다고, 매년 돌아가면서 벌초를 했어요. 가정마을에 사는 친구들은 매일 기생 무덤을 밟고 두북초등학교에 다녔어요. 때로는 학교는 안 오고 학교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기생 무덤에서 수건 돌리고 미끄럼 타고 그랬지요. 우리도 소 먹이러 가면 소는 산에 올려놓고, 수건 돌리고, 미끄럼 타고, 옆 도랑에서 사고디를 잡아서 불 피워 구워먹고 그랬지요. 그때 사고디는 큼직했어요. 그 골짜기를 제피골. 그 거랑을 살그내라고 불렀지요. 동네일을 많이 본 오빠 최남식(1939∼2017)씨한테서 기생 무덤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유명한 기생이라고….”

2019년 8월 24일(토), 8월 11일(일, 말복)에 만난 참배객들의 소개로 아홉 명이 다시 전화앵 할머니를 찾았다. 오후 4시에 도착해서 푸짐하게 제물을 올렸다. 동참자들은 전화앵에 대한 전설을 듣고 지극한 마음으로 참배했고, 음복을 하고나서 기쁜 마음으로 회향했다.

이제 전화앵은 경배의 대상을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와 또다시 전화앵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열박령 할머니, 활천 할머니, 살그내 할머니, 전화앵 할머니를 속으로 불렀다. 지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는 무쇠 같은 기개에 놀란 일본 왕이 “신하가 되어주면 여생을 편안히 지내도록 해주겠다”고 하자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계림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소!” 하면서 일왕을 노려보았다던 신라 만고충신 박제상의 이야기가 전설이 된 두동과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고려조의 주유시인)가 전한 전화앵 이야기가 전설로 뿌리내린 두서 활천이 점차 부각되고 있으니 참으로 기쁘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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