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도시, 아프도록 달콤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도시, 아프도록 달콤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2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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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 한 장면.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한 장면.

 

뉴욕의 뒷골목 작은 레스토랑 카페. 한 여자의 전화가 다급하게 걸려온다. 한창 바쁜 저녁 시간이었지만 남자는 왠지 빨리 끊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이 말하는 남자가 어젯밤 카페에 왔냐고 캐묻는 여자의 흥분 섞인 목소리에서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잠시 뒤 카페로 달려 온 여자는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말한 그 사람이 어젯밤 다른 여자와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는 말에 낙망한다.

밖으로 나간 여자는 찾고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나 말고 만나는 사람 있어?”라고 캐묻고 그 여자가 누군지 알게 된 여자는 욕세례를 퍼부은 뒤 전화를 끊는다.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온 여자는 열쇠 하나를 남자에게 건네며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개자식”이라는 말과 함께 전해주라고 한 뒤 카페를 떠난다. 하지만 몇 시간 뒤 카페가 묻을 닫을 시간에 여자는 다시 카페를 찾아 남자에게 열쇠 찾아갔냐고 묻고 “아직”이라는 말에 더욱 낙심한다.

마음을 잡지 못해 카페 문 앞을 서성이던 여자는 결국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와 “말동무가 필요하다”며 남자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이후 여자는 며칠 동안 묻을 닫을 시간이면 어김없이 카페를 찾아 남자가 만들어준 블루베리 파이를 먹으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간다. 여자의 이름은 엘리자베스(노라 존스)였고, 남자는 제레미(주드 로)였다. 사실 블루베리 파이는 그 카페에서 가장 안 팔리는 파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리를 가득 메운 네온사인은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카페를 가득 채운 각종 파이들로 달콤함도 넘쳐났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엔 상처와 슬픔, 그리고 눈물이 넘쳐흘렀다.

도시의 밤은 언제나 낮보다 뜨겁다. 낮 동안 딱딱하게 굳어있던 도시인들의 진심은 밤이 되어서야 서서히 녹아내린다. 진심은 술로 달궈진다. 그들이 술을 마시는 까닭은 마시다 보니 늘게 된 까닭도 있지만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진 자신이 싫은 것. 그나마 술에 취하면 새로워지는 느낌이지만 술이 깬 아침이면 상처는 더 쌓인다.

그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들은 웃음을 보이며 세상과 다시 마주한다. 도시에서의 일상은 늘 포커판을 방불케 한다. 슬퍼도 웃고, 웃고 있지만 슬픈 사람들. 가슴 아픈 건 상처받았어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이젠 만성이 될 법도 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두렵고, 그래서 슬픔을 끊을 수가 없듯 술도 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도시의 혈관은 밤이 되면 알코올로 물 든다.

도시인들이 비틀대는 건 스며들 곳이 없기 때문. 성공이든 사랑이든 도시는 어느 것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도시는 빗물조차 스며들 곳이 잘 없다. 고이거나 뭉쳐 바다나 강으로 흘러들어가거나 뜨거운 태양이 다시 출현해 물기를 거둬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사랑, 그건 너무 많아 늘 마주치긴 한다. 신체적으로는 지나치게 가깝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이라 해도 가까이 스친 순간, 서로의 거리는 0.01cm밖에 안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진심의 거리는 1억 광년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인연이 없다면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을 테니. 도시에서 진심은 그런 존재다. 다이아몬드 같다.

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엘리자베스도 다이아몬드 같은 진심을 다해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상처받은 엘리자베스는 제레미의 카페 맞은편 2층에 위치한 그 남자의 방 안이 두려워 도로 하나를 건너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래서 떠났다. 최대한 멀리.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일하게 된 술집에서 그녀는 별거 후 아내 때문에 힘들어하며 늘 술에 절어 사는 어니(데이빗 트리스탄)를 만났고, 카지노에서는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속이려는 레슬리(나탈리 포트만)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남겨진 제레미는 손님들이 다 떠난 뒤 함께했던 밤을 그리워하며 그녀를 기다린다. 팔리지도 않는 블루베리 파이를 왜 자꾸 만드냐는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제레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팔리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으니까요.”

화려한 도시에서 사랑이란 어쩌면 아무도 찾지 않는 한 조각의 블루베리 파이 같은 것. 찾는 이가 없어 오히려 위로가 된다. 블루베리 파이는 밀가루 반죽과 블루베리라는 이질적인 재료 사이를 우유가 스며들면서 만들어진다. 제레미와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진심이 스며드는 데는 1년이 걸린다. 도시에 나쁜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상처가 두려워 가까이 있어도 서로가 너무 멀 뿐, 그래도 한 조각의 달콤함이라도 함께 맛볼 수 있는 그대가 있어 상처투성이로 초췌해진 도시는 비로소 찬란하게 빛이 난다.

2008년 3월6일 개봉. 러닝타임 94분.

취재1부 차장 이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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