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산책] 뉘른베르크에서 길을 묻다
[법정산책] 뉘른베르크에서 길을 묻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20 23: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문 중인 회사의 계약서 검토 건이 생겨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독일 출장을 다녀왔다. 계약서 검토 업무가 마무리된 뒤에는 인근 도시들을 찾아가 그동안에 쌓인 긴장도 풀면서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비교적 오랜 시간을 보낸 뉘른베르크에서는 역사적 현장을 둘러볼 수 있어서 의미가 깊었다.

출장 업무를 마치고 짧은 여유를 가지게 된 시점에 찾아본 뉘른베르크의 첫인상은 그저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도시일 뿐이었다. 구시가를 둘러싼 웅장한 성벽, 독특한 모습의 성모교회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 로렌츠 교회, 구시가를 유유히 흐르는 페그니츠 강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와 함께 그간의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해주었다. 그렇게 망중한을 즐기는 동안 귀국일이 다가오자 이번에는 남은 시간 동안 무언가 의미 있는 기억을 남기고 여행을 마무리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뉘른베르크 중앙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체펠린 비행장과 인근의 나치 전당대회장이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의 전당대회가 오랜 기간 열린 장소인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연합군이 나치의 전쟁지도자에 대한 국제군사재판을 진행한, 역사적·국제법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어서 그 현장을 몸소 체험한다는 것은 몹시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먼저 찾아간 체펠린 비행장에는 체펠린의 비행선이 착륙한 곳에 건설된 거대한 연단이 있었고, 언뜻 보기에도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연단 옆에 설치된 안내문은 이 연단이 페르가몬의 고대 제단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전쟁 당시 폭격으로 상당부분이 파괴되었으나, 1938년 당시의 사진을 통해 과거의 웅장하고 압도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일부분만으로도 한 시대를 휩쓸었던 거대한 광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는데,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미완성의 거대한 나치 전당대회장과 그곳에 자리한 기록의 전당이었다. 저 멀리 콜로세움과 같은 새하얀 모습의 거대한 전당대회장은 큰 호수를 사이에 둔 체펠린 비행장에서도 볼 수 있었고, 워낙 규모가 커서 마치 화면을 합성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신기루처럼 손에 잡힐 듯한 그곳은, 가까운 듯하면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 길을 잃고 헤맨 탓에 기록의 전당 입장시간은 이미 지나버린 뒤였고, 거대한 미완성의 전당대회장이라도 볼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검색을 통해 찾아본 기록의 전당에서는, 나치 관련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부끄러운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활용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독일인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더니 이번엔 그것과는 또 다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사 문제로 다시 촉발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신경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종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문득 뉘른베르크에서 돌아본 역사적 현장,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 둘러본 국립 게르만박물관 정문 앞의 ‘인권의 길’이 떠올랐다.

여기에는 8m 높이의 원형기둥 30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각 기둥에는 UN 세계인권선언 전체 30개 조항이 독일어와 서로 다른 30개 국가의 언어로 적혀 있다. 특히 제1조는 독일어와 함께 유대인의 언어로 적혀 있어 눈길을 끈다. 나치 최대의 희생양이었던 유대인의 언어를 가장 먼저 새김으로써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UN 세계인권선언 제1조의 내용이다. 부끄러운 과거라 하여 의도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외면한다면, 고통 받았던 그 이웃들로부터 참다운 형제로서 대접받을 수 있을까. 오랜 역사의 굴곡을 지나 서로를 진정한 형제애로 대할 수 있는 그날은 과연 언제쯤 올 수 있을지. 궁금증이 켜켜이 쌓여가는 요즘이다.





류선재 고래법률사무소 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