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義妓)논개’ 표현 바로잡아야
‘의기(義妓)논개’ 표현 바로잡아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1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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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논개의 충절을 읊은 변영로 시인의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는 시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 남강에서 왜장(倭將)을 껴안고 물에 빠져 순절한 ‘기생 논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기생이 아니었다는 것은 많이 알지 못한다. 이를 바로잡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산책한다.

논개는 신안주씨인 주논개(朱論介)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1574년 9월 3일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나 17세 때인 1591년에 장수현감 최경회와 결혼한다. 가세가 기울어 후처로 갔다고도 전해진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희는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된다. 경상도에서도 인근 진주성만 점령당하지 않고 왜적과 악전고투하는 것을 안 최경희는 의병을 이끌고 김시민의 진주성을 지원해 승리를 거둔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경상우병사로 임명된 최경희는 수많은 군관민과 함께 싸웠으나 28일 만인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자결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려고 칠월칠석날 잔치를 벌이면서, 조선인은 오직 기생만 출입을 허용한다. 19세였던 주논개는 부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변장하고 촉석루 연회장에 들어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투신한다. 그녀는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적장을 강에 밀어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리 열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적장 게아무라 로쿠스케와 춤을 추는 척하면서 깍지 낀 손으로 허리를 끌어않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적장과 함께 순절한다.

이런 주논개는 어떤 충절인사에 못지않은 열사요, 의사다. 그러나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입으로만 전해오다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으로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기생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다. 그 때문에 ‘기생의 정열을 표창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들의 공훈을 수록한 『동국신속삼강행』에도 누락되고 만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절을 높이 찬양해 예문관에서 ‘의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주 촉석루 곁에 사액 정문을 지어 그 넋을 위로·추모하게 했다. 이에 따라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고, 영조 16년(1739)부터 국가 지원을 받아 의암 부근에서 제를 올릴 수 있게 되었으며, 현재 경남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200년이 흐른 뒤 조정에서는 특전을 내려 태어난 주촌마을 입구에 정려(旌閭)를 세웠고, 1997년에 복원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라북도 장수의 의암사와 경상남도 진주의 의기사 2곳에 있는 주논개의 사당에 ‘의기(義妓)’라는 표현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데 있다. 의암사는 전북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고, 순절한 9월 3일을 군민의 날로 정해 논개 축제를 벌인다. 그런데, 경내에는 1846년(헌종 12) 당시 현감 정주석이 ‘의기’라 명명한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가 지금도서 있다. 진주에서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이름이 있고 사당 안내문에도 ‘의기’라는 표기가 남아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의암부인 주논개는 기생이 아니었으므로 의기(義妓)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관계기관에서는 하루빨리 근거를 찾아 이를 바로잡고 임진왜란 충신·효자·열녀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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