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에 의지한 서정자 여사
휠체어에 의지한 서정자 여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1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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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74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 오전, 동구 화정공원. 지난밤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이날따라 몇 가지 상상도 같이 몰고 왔다. 혹자는 ‘고인의 눈물’이라고 그럴듯하게 의미를 달았다. 그러나 우리나이로 아흔 여섯인 서정자 여사에게는 모든 것이 귀찮게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방어진에서 태어난 서 여사가 이날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마을로 초대받은 것은 순전히 화정공원에 안치된 부친 서진문 선생(19 00~1928)의 흉상 제막식 때문이었다. 서진문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일깨워준 일산마을 ‘보성학교’에서 야학 운동에 몸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1928년, 28세의 나이에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붙잡혀 옥살이를 하다가 모진 고문 끝에 출옥 바로 다음 날 순국한 분으로,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바 있다. 울산동구청이 광복절 74주년 기념행사의 주제를 ‘서진문 선생 흉상 제막식’으로 잡은 것은 정천석 구청장이 이 숭고한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고 옷깃을 여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의 시각에서는 아쉬운 점이 의외로 많았다. 흉상 제막과 관련, 동구청이 보여준 대부분의 일들이 서투르고 ‘관 주도적’으로 비쳐진 탓이다. 첫째는 흉상의 이미지이고, 둘째는 흉상이 들어선 위치다. 유족 대표 격인 서진문 선생의 외손자 천영배(72, 서정자 여사의 장남)씨는 흉상의 이미지가 외조부의 실제 이미지와는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3차례나 난색을 표시했으나 조금도 반영되지 못했다. 또 흉상이 들어설 곳으로 노인쉼터(정자) 자리를 원했으나 민원의 소지가 크다는 이유로 이 또한 거절당했다.

셋째는 추모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먼 프로그램 내용과 미숙한 사회솜씨다. 이날 행사의 주인(호스트) 격인 동구청장은 러시아 출장 계획이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참석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자리를 부구청장이 메웠으나 얼굴만 내밀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전체 행사의 진행은 구청 여직원이 도맡았다. 하지만 사회자는 사전준비가 없었던 듯 실수연발로 분위기를 그르친 셈이 됐다. 김종훈 ‘국회의원’을 ‘구청장’이라 하는 등 내빈 이름을 두 차례나 잘못 소개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눈살을 가장 찌푸리게 만든 것은 행사 분위기에 걸맞지도 않고 요란스럽게만 느껴진 공연 내용이었다. 서정자 여사의 일기를 신파조로 읽어 내려간 프리랜서의 낭송과 ‘으’와 ‘어’도 구분하지 못한 사투리 발음은 물론 격에 어울리지 않은 선곡도 낯을 붉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부르게 하기보다 차라리 추모음악을 경음악으로 들려주었더라면 하는 뒷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우중천막 행사가 끝나고 흉상 앞 기념촬영이 이어지던 시각, 서정자 여사의 2남 2녀와 가족들은 추적거리는 비를 맞아 가며 자리를 떠야 했다. 공원 위쪽 서진문 선생의 묘소 참배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다. 가족들은 서 여사가 의지한 휠체어를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린 채 미끄럽기 짝이 없는 74개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올라갔다. 서진문-서정자 부녀의 6년 만의 재회가 이어졌다. 그러나 눈물은 없었다. 그 이유는 서 여사 장남의 귀띔에서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날따라 치매증세가 심하셨지요. 다행히 감기는 안 걸리셨지만 그날 울산 갔다 오신 사실은 지금도 기억하지 못하신답니다.” 서정자 여사와의 만남은 74돌 광복절 날이 두 번째였다. 휴가 중이던 지난달 27일, 부산 초읍 ‘독립유공자의 집’을 방문하던 날 서 여사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잡으시곤 품위 있게 절을 받으셨고, 덕담도 건네주셨다. 큰아드님 천영배 씨가 이해를 도왔다. “찾아주신 그날은 어머님께서 모처럼 정신이 맑으신 날이었습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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