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언덕에서 (下)
잔디언덕에서 (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18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젠 고양이가 등장한다. 허리의 등은 약간 검은 색이지만 흰색무늬가 배 쪽에 크게 그려져 멋지다. 큰 시선으로 보면 허리를 쭉 펴고 움직이는 것이, 마치 저 아프리카 세렝게티 광야에서 이동 중인 사자 모습 같다. 어이! 지난밤에 너도 잘 잤는가?… 대꾸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천천히 사라진다.

나만의 잔디언덕을 청소한 지 11일째다. 잔디언덕 바로 앞은 초등학교 후문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꼬맹이들이 9시 10분전쯤 되면 집중적으로 후문을 통하여 등교한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어서 잔디에 ‘외줄기 길’이 생긴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잘 표현한 시인 복효근은 ‘잔디밭’을 비유적으로 읊고 있다.

“천변 잔디밭을 밟고 사람들이 걷기 운동을 하자/ 잔디밭에 외줄기 길이 생겼다/ 어쩌나 잔디가 밟혀 죽을 텐데/ (중략) / 죽은 잔디 싹들이 사람의 몸속에 푸른 길을 내고 살아 있는 것이 푸른 잔디의 것이 아니라면/ 저 사람들의 말소리가 저렇게 청량하랴” 〔잔디에게 덜 미안한 날, 복효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잘 탐색하는 듯하다.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순환론적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멋지게 노래하고 있다.

이런 잔디언덕으로 많은 아이들이 지나쳐가니 버려진 것들도 많다. 학교에서 나누어준 우유팩, 눈깔사탕 비닐, 쭈쭈바 막대기 등이 대부분이다. 하필이면 후문 샛길로 통학하는 걸까? 화장실 뒤편을 지나는 길이어서 냄새도 좀 날 텐데…. 아저씨! 그래도 이 길이 너무 편해요! 좀 더 빨리 교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축구공을 차면서 등교하는 아이도 있다. 잔디를 못살게 굴면서 후문을 향하여 단독 드리블을 하며 간다. 교장선생님한테 분명 주의말씀을 많이 들었을 텐데…. 그 뒤로 자전거를 탄 아이. 아예 내가 좋아하는 잔디언덕을 한 바퀴 돌고 재빨리 사라진다. 산악자전거를 처음 도입한 가수 김세환같이 날쌔게 지나간다. 정말로 밟혀죽은 잔디 싹들이 그 아이들 몸속에 파릇파릇 살아있어 힘이 펄펄 넘치는 건가.

오늘따라 언덕이 온통 초록빛으로 빛난다. 오가면서 늘 관찰하는 푸른 언덕, 겨울에는 약간 누릇누릇하지만 늦가을까지는 제법 초원을 연상케 한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굴곡진 부분도 있지만 낮은 언덕에 잔디가 덮여있는 것이 자못 목가적이다.

갑자기 잔디 깎는 인부들이 매몰차게 기계음을 내면서 벌초작업을 한다. 벌초가 아니라 잔디를 살리기 위한 일이란다. 내가 아끼는 오목한 언덕배기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야생초 군락이 생겼다. 완전히 깎이어 멸종 일보직전이다. 잔디를 짧게 깎는 이유는 숙적 클로버를 죽이기 위한 작업이라고. 비온 후 촉촉이 물에 잠겨있는 그 진귀한 야생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생기발랄하여 난 강력한 기력을 받는다. 아니 그것보다 마음의 위로를 듬뿍 받아 애지중지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잔인한 인간들이 벌초를 해버렸단 말이지! 너희들하고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아! 야생초가 버럭 화를 내는 듯하다.

웬일인가. 어제까지 보였던 잔디언덕 위의 자작나무 한그루가 갑자기 사라졌다. 구부정하게 기울어진 채 늘 위험한 모습으로 서 있더니 말이다. 추운 지방에서만 산다는 나무가 여기에 외로이 서 있어 늘 조마조마했다. 자태가 우아하여 숲속의 여왕이라 하지 않는가? 하얀 눈과 하얀 곰에 잘 어울리는 백색의 깨끗한 나무. 인부의 톱으로 잘려나간 자국을 보니 마냥 애절하기만 하다.

오늘은 궁금한 자연의 일들이 참 많았다. 내일은 또 어떤 주인공이 등장할지 궁금하다. 한여름 나만의 잔디언덕에서 소소한 행복의 아침을 맞는다.



김원호 울산대 인문대학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