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구 교육복지 헌신한 이종산씨 재조명 필요
울산 동구 교육복지 헌신한 이종산씨 재조명 필요
  • 남소희
  • 승인 2019.08.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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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동구 교육환경 개선 앞장전재산 들여 방어진중학교 건립손자 이상영씨는 기초수급자후손 지원 방안 마련 목소리도
이상영씨(왼쪽 두번째)가 1963년 고교 졸업 후 아버지 이율우씨가 운영하던 ‘울미여관’ 앞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이상영씨(왼쪽 두번째)가 1963년 고교 졸업 후 아버지 이율우씨가 운영하던 ‘울미여관’ 앞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울산 동구 지역에는 해방 직후 벌어들인 전 재산을 학교를 세우기 위해 내놓은 인물이 있다. 바로 방어진 중학교(방어진수산초급중학교, 1947) 설립자인 고 이종산씨다.

이종산씨는 해방 후 일본인에게 인수한 후리막(그물 고기잡이)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중학교가 없었던 울산 동구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안타깝게 생각해 전 재산을 방어진 중학교 건립에 내놨다.

이처럼 전 재산을 헌납해 동구 교육 부흥에 힘썼지만, 그 후손은 정작 어렵게 살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종산씨의 손자 상영(76)씨는 동구 제일가는 부자였던 할아버지의 명성과는 달리 현재 북구의 단칸방에서 기초수급자로 병마·가난과 싸우고 있다. 그의 아버지인 이율우씨도 말년엔 오갈 데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차남의 집에서 숨을 거뒀다.

이상영씨는 “아버지가 여관을 할 때까지만 해도 부산으로 유학을 가 부산고를 졸업했지만, 곧 형편이 어려워져 외항선을 탔고, 울산의 석유 회사에서 허드렛일을 했다”며 “이후로 무위도식하며 살다가 얼마 전 허리가 아파 수술을 받았다. 예후가 좋지 않아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옛말에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살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처럼 부호의 손자 상영씨가 어렵게 살고 있는 데 대해 이들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당시의 학교 운영 환경과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손자(상영씨)”를 이유로 들었다.

해방 직후 후리막 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이종산씨는 벌어들인 돈으로 뜻깊은 일을 하고자 했고 당시 중학교가 없던 동구에 어린이들의 중학교 진학을 돕기 위해 방어진 중학교를 세웠다. 그 당시 이종산씨의 집은 일산진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기를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

이후 이종산 선생은 아들 이율우씨에게 방어진 중학교 이사장직을 물려줬다.

하지만 이종산 선생이 방어진 중학교 건립 때 내놓은 토지 10만 평과 200만원은 교사 월급을 지급하고 학교 운영을 이어가는 바람에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율우씨는 부친의 덕택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오는 등 신학문에 일찍 눈을 떴지만,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해 이종산 선생 사후 재정부담으로 방어진중학교 이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학교는 공립으로 바뀌었다.

이종산씨가 외아들인 율우씨에 남긴 것은 일산 앞바다 후리막 뿐. 넘치던 일산 앞바다 고기의 씨가 마르면서 율우씨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일산진 일대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방어진 어민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는 당시 보도가 이를 설명해준다.

율우씨는 ‘울미여관’이라는 여관방을 운영했지만 역시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손자 이상영씨는 그가 다니고 있는 교회 신도들이 가져다주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다가오는 제74회 광복절을 맞아 동구 교육복지에 이바지한 또 다른 의미의 ‘교육독립 운동가’ 고 이종산씨를 재조명하고 그의 후손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구 주민 이모(64)씨는 “현재 방어진 교육연수원자리를 기부체납한 이종산씨를 동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자손이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동구발전을 위해 애쓴 공로를 인정해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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