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은 일제강점기 울산 야학운동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은 일제강점기 울산 야학운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1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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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울산시교육청이 기획한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그 네 번째 이야기에 따른 특별기고문이다.- 편집자 주

올해 광복절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일본이 지난달부터 시작한 보복 수출규제에 맞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제품 불매에 나섰고, 정부와 기관의 대응도 발 빠르게 이어지는 탓이다. 울산교육청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네 번째 걸음을 더욱 의미 있게 내딛는다.

교육청이 이번에 주목한 것은 그동안 미처 몰랐던 일제강점기의 울산 야학운동이다. 야학은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을 걸고 처음 등장했다. 울산은 1910년 동구 개운학교(현 남목초등학교)에서 설립한 대창야학교가 첫 야학이다. 1917년 9월에는 중남면 신화리에 3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친 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울산에서 야학 바람이 휘몰아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당시 울산 곳곳 35개 지역에 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청년조직과 지역유지들이 중심이 돼 100여 곳에 이르는 야학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야학이 다수였지만 일반야학과 함께 여성야학도 곳곳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야학끼리 함께 연대하는 노동야학연합회로 진전됐다.

야학은 말 그대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곳이다. 일제가 민족사립학교를 탄압해 폐교시키거나 공립보통학교로 전환시켰지만 보통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입학지원자는 많지만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수업비를 내지 못할 만큼 가난이 장벽이 됐다. 그리고 입학 때를 넘긴 이들도 수두룩했다.

마을 사람들이 ‘새끼를 꼰 돈을 모아 강습소를 차렸다’는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맘이 뭉클해진다.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가갸거겨를 주라’는 당찬 호소도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민족역량을 키우고 나아가 항일을 위해 글을 깨우치고 배움을 얻자는 각성은 너무도 절실했다. 강철(姜徹 1899~?)과 신학업(申學業 1901~1975)처럼 야학을 떼어놓지 않고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겪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가난 때문에 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고 더 품으려 한 야학운동 정신은 요즘 상황에 맞물려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7월 초 일본 아베 정부가 강제징용노동자 배상 판결을 들먹이며 보복과 도발을 말했을 때 당겨진 불매운동. 일본 극우인사들은 한국의 불매운동을 늘 실패했다고 조롱 섞인 전망을 내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을 보면 참가하는 국민들 스스로 놀랄 만큼 위력을 보이고 있다. 깨어있는 국민들이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총칼로 짓밟혀 나라를 빼앗겼지만 굴종하지 않고 떨쳐 일어난 만세운동도 그렇게 모두가 하나 된 힘이었다. 그 뒤 끊이지 않는 탄압에도 민족 스스로 힘을 얻기 위해 배움의 공간을 만들었던 열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깨어있는 참교육의 징표가 100년 전 울산 야학에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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