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백성의 몫인가?
또 백성의 몫인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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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束帶發狂欲大叫(속대발광욕대규)’ 중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실린 이희승 선생의 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의 한 구절로, 요즘 딱 어울리는 글귀인 것 같다. 원래는 ‘더위에 의관을 차려입고 있으니 미칠 것 같아 큰소리라도 지르고 싶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냥 큰소리로만 읽어도 느낌이 와 닿는 것 같아 학창시절부터 즐겨 소리를 높이곤 했다.

중복과 말복 사이가 연중 가장 무더운 시기여서 ‘찜통더위’니 ‘염천지절’이니 하며 가만있어도 몸이 달아오를 판이다. 그런데 올여름엔 일본의 경제보복까지 겹쳤으니 내열(內熱)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일본의 경제보복보다 필자를 더 열 받게 하는 건 우리 정부와 지자체의 미숙한 대응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부터 충분히 예상된 시나리오였다. 외교적으로 능히 풀 수 있는 사안을 수수방관만 하다 이 지경까지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필자와 같은 중소상공인은 그렇잖아도 경제가 어려운 판에 미중 무역갈등에다 일본의 경제침략까지 겹치면 어찌 되냐며 푸념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 판결에 따른 강제징용 피해 배상 방법으로 전범기업 재산 몰수라는 극약처방 대신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 정부가 나서서 “그깟 더러운 전범기업의 돈 말고 우리 국민이 낸 깨끗한 세금으로 그간의 노고에 보답하겠다.”고 했으면 보기에도 떳떳하지 않았겠는가?

일본의 보복성 규제가 연이어 발표되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비장한 어조로 극일(克日) 의지를 밝히고, 지자체들은 앞 다투어 일본과의 교류 단절을 선언하기에 바빴다. 이미 민간 베이스로 ‘노 재팬’의 불길이 번지는 마당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정부나 지자체는 대응전략만 차분하게 세우고, 발언수위는 외교관계를 감안해 좀 더 신중하게 조절할 수는 없었을까?

이번 사태의 백미는 서울 중구청의 무뇌아(無腦兒)적 발상이지 싶다. 이 지자체는 ‘NO 재팬’ 배너기를 명동 여기저기에 게시했다가 비판여론에 못 이겨 하루 만에 내리고 말았다. ‘노 재팬’이든 ’노 아베‘든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해야 파워도 세지고 대외적 효과도 커진다. 국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주면 정부나 지자체는 선택과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이번 경우는 국민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지자체가 발로 찬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수의 선량한 일본 국민마저 적으로 만들면 안 된다. 정부나 지자체는 대적할 상대가 누군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밉든 곱든 어차피 일본과는 이웃국가로서, 경제공동체로서, 지역동맹국으로서 함께 가야 할 숙명을 지니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는 우리 국민과 일본 국민을 자극 또는 선동하는 일에 헛힘을 쓰기보다 진정한 극일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똑똑하고 의로운 백성이기에 하는 소리다. 임진왜란 때를 돌이켜보자. 당파로 대립하던 사신들이 일본을 갔다 와서는 서로 다른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국론분열로 이어져 왜적의 침입에 대비할 골든타임을 놓친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선조가 백성들을 내팽개치고 의주로 피난 간 일 역시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결국 패망 직전의 조선을 구한 주인공은 백성들이었다. 나라에서 특별히 해준 것도 없었고, 오히려 탐관오리들의 수탈의 대상이었는데도 이들 백성은 이름 없는 의병이 되어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고, 마침내 이 나라를 구했다.

일제강점기 때도 일제는 고종과 순종을 멸해서 조선의 주체를 없애면 곧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 백성들은 구심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국내에서는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같은 구국운동을 펼치면서 끝까지 항거한 끝에 광복의 보람을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최근만 해도, 지난 정권의 실정과 국정농단에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이렇듯 우리 국민, 우리 백성들은 언제나 똑똑하고 의로웠다. 정권이 안정되고 나아갈 목표가 정해지면 우리 국민들은 놀라울 정도의 능력과 에너지로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이런 국민의 역량을 한데 모으고 이끌 구심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이젠 냉정하게 대처해서 진정한 극일을 이루어내야 한다. 국내 산업의 취약점인 기초소재의 국산화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바쁘게 진행되어야 한다. 말로는 쉬운 실행을 제대로 하려면 제도부터 의식까지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중소기업이 뼈 빠지게 노력해서 개발한 기술이나 제품들이 한 번도 못 쓰이고 사장된 것이 부지기수이다. 이런 사례를 열거하려면 신문을 몇 달을 찍어내도 모자랄 판이다.

이제는 우리 국민들의 역량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백성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 않도록, 정부와 지자체는 똑바로 해야 한다. 모든 결과는 결국 우리 국민들이 떠안아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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