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선물
마음의 선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07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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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동서와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싱가포르 여행을 떠날 때였다. 평소 멀미를 잘하는 나는 새벽녘 공항버스 맨 앞자리에 몸을 기댔다. 피로도 풀 겸 잠이라도 청해볼 참이었다.

그 사이 어느 새댁이 아기를 안고 내 옆자리에 앉더니 어디로 가는지, 누구와 가는지 말을 붙여 왔다. 시댁 식구들과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라고 하자 그녀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얘기를 하소연처럼 풀어내기 시작했다. 시댁 식구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얘기였다.

전날 잠을 잘 못잔 탓에 졸리긴 했지만 애써 참으며 얘기를 들어주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얼마나 컸으면 처음 보는 나에게 하소연을 다하는 걸까.’ 나는 어느 새 맞장구까지 쳐가며 위로를 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동서에게 생일 때마다 선물을 해주고 조카들에게는 용돈도 주면서 잘 대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면서, 나더러 어떻게 했기에 동서들과의 사이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 왔다. 그 순간 나는 동서와 함께했던 20여 년의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동서는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마음이 참 순수하면서도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특히 요리솜씨가 대단하고 손재주도 있어서 커튼이며 이불커버를 직접 만들고 옷 수선도 손수 한다.

내가 맏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동서는 언제나 나를 믿고 따라준다. 동서가 그래서 고맙다. 남편이야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사람이지만 시댁 식구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맺어진 인연이 아니던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나의 휴대폰에 저장된 동서 이름 앞에는 언제나 ‘천사 OOO’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마음이 천사 같기 때문이다.

잠시 동서 생각을 하는 사이 김해공항 국제선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나는 새댁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넨 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들어섰다. 동서와 잠시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공항버스 트렁크에 넣어둔 캐리어 꺼내는 것을 깜빡 잊고 작은 배낭만 달랑 메고 내린 것이었다.

“동서야, 큰일 났어.” “왜요 형님,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캐리어 안 가지고 내렸어. 어머님한테는 말하지 마.”

순간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캐리어를 찾아야 했기에 밖으로 뛰어나왔다.

고맙게도 캐리어는 우여곡절 끝에 찾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건망증이 있긴 했지만 공항버스에다 캐리어를 두고 내릴 만큼 증세가 심각해진 나 자신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한 덕분에 어머님 몰래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이 일을 알게 되셨다면 얼마나 조바심을 내며 불안해 하셨을까 싶었다. 내가 캐리어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비밀을 끝까지 지켜준 동서가 고마웠다.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인사했고, 우리는 다 함께 추억 만들기에 들어갔다.

값비싼 물건을 선물 받으면 그 순간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바래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함께한 추억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여행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값진 마음의 선물이 되는 것 같다. 마음 밭 고운 동서와 어머님과 함께할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천애란 재능시낭송협회 울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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