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형 칼럼]하양, 파랑, 또 민족색
[이노형 칼럼]하양, 파랑, 또 민족색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0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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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색채감각이 섬세하고 풍부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파랑색은 반물·남색·옥색·유록·두록·아청·천청·비색·이청색 등으로, 빨강은 홍·다홍·진홍·도홍·심홍·연홍·은홍·수홍·목홍·분홍·소홍·연지·천홍 등으로 다채롭게 이해되곤 했다.

그에 걸맞게 색채어(色彩語)들도 섬세하고 다채롭다. 파랑색은 파랗다, 새파랗다, 파르스름하다, 파르스레하다, 파릇파릇하다, 퍼렇다, 시퍼렇다, 푸르다, 푸르스름하다, 푸르스레하다, 푸릇푸릇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딩딩하다, 푸르스레하다, 푸르데데하다 등의 갖은 색채어들을 보유한다. 빨강도 빨갛다, 붉다, 발갛다. 벌겋다 밖에 새빨갛고 빨그레하고 빨긋빨긋하거나 빨그스레하고 뻘겋고 시뻘겋고 불그레하여 그 종류가 숨찰 정도로 숱하다.

이런 풍요로운 감각들이 선명한 계절의 변화나 풍부한 햇볕 현상, 특히 조상들의 탁월한 미적 감수성이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그에 근거한 오방색(五方色) 체계에 근거할 경우 동방에 자리한 우리는 청색의 파랑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된다. 우리의 민족색은 파랑이 되는 셈이다.

조상들의 유다른 파랑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도 보인다. 과연 상층의 관복이나 길복(吉服=상·喪을 끝내고 다시 갈아입는 평상복)의 도포, 색동과 단청 등에서부터 청실홍실이며 사모관대, 원삼과 같은 일상의 예복이나 화려한 색동, 세모시 옥색치마에 이르기까지 청색은 두루 사용되었다. 나라는 백의금령(白衣禁令)을 내려 ‘동방의 색’ 청색 옷을 거듭 강요하곤 했다. 청구(靑丘)가 우리나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랑이 철학 체계까지 들이밀며 은근히 강변할 정도의 대표적 민족색일 수는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더욱 익숙할 흰색이 있기 때문이다. 오방색 체계 안에서 이 하양은 서쪽 오랑캐의 상징색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파랑, 하양, 빨강, 검정 각각은 오랑캐들을 구별하기 위해 붙여놓은 정치적, 이념적인 딱지들일 수가 있다. 중국의 사방은 오랑캐들로 득실득실했던 모양이다.

티베트 등의 서쪽 오랑캐가 흰색을 어느 정도로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에 견주어 동쪽 오랑캐인 동이(東夷)가 흰색을 유달리 좋아했던 현상만큼은 단언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흰옷차림은 남녀나 지역, 계절, 또 기능 등의 차이를 가리질 않고서 압도적 비중을 지닌 옷차림이다. 빨래를 자주 해야만 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이며 소재 천의 해어짐 등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굳이 흰색 옷차림을 고집해 왔다.

배내저고리, 상복, 상층의 일상복과 속옷도 흰색이었다. 중국 옛 문헌들이나 백여 년 전의 선교사 등 외국인들의 눈에 가장 이국적으로 다가간 색채도 백의의 흰색이었다. 나아가 궁궐이나 절집을 뺀 민간의 이엉집, 기와집의 안팎도 두루 흰색이나 자연적 소색(素色)을 사랑해 왔다. 밥 색깔이 흰색이었고 김치도 애초에는 백김치였다.

세종과 영·정조마저도 금령을 내려 황색 옷은 물론이거니와 흰옷조차 못 입도록 막아 나서던 시절이 있었다. 음양오행이나 오방색 규범을 내세운 그런 짓들에 문화적 억압의 의도만 깃든 게 아니었다. 일제가 민족혼을 없애고자 흰옷 금지 정책을 펼친 것처럼 억압과 복종이라고 하는 정치적 목적의식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오방색 안에서 세상의 중심은 늘 황제와 중국이었다. 그것은 패권적 천하관(天下觀)의 중세기적 오만이었다. 복종과 순응을 미덕으로 알던 비겁한 정치적 사대와 노예의식도 거기에 공존했다. 역사의 실제와 현장 차원에서는 안팎의 그런 수난을 관통하며 늘 유구한 시간을 이어온 색은 흰색이었다. 그것은 가장 대표적인 민족색이기도 했다.

독도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군용기에 우리 공군이 경고사격을 가하자 엉뚱하게도 일본이 나섰다. ‘우리 영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한-러 정부를 향해 발칵 한 것이다.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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