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감이 높으면 상실감도 커진다
기대감이 높으면 상실감도 커진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7.3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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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농구와 야구선수를 잠깐 했을 정도로 구기 종목을 참 좋아한다. 한국화학연구원 대전본원에 있을 때 사회인야구대회인 사이언스 리그에서 에이스 투수로 우승하며 MVP상을 받았을 정도다. 잠 못 이루는 무더위에도 주말이 되면 두 개의 흥미로운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 주가 지루한 줄 몰랐다. 토요일에는 호날두가 뛰고 있는 유벤투스가 방한하여 K-리그 팀과의 축구 친선경기가 예정돼 있었고, 일요일 아침에는 다저스의 류현진이 시즌 12승 및 한미(韓美) 통산 150승을 달성하기 위한 워싱턴과의 메이저 야구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둘 다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우선, 세계적인 선수들로 구성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가 한국을 찾았다. 세계적인 강팀이며 명문팀이지만, 팬이라면 누구나 슈퍼스타 호날두가 뛰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을 게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현장을 찾은 젊은 축구 팬들은 더욱 그랬다. 전반전을 마쳤을 때만 해도 “후반전엔 나오겠지. 전에 메시도 그랬어”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는 곧 산산조각이 나면서 허공에 흩어졌다. 전광판에 비친 호날두 모습을 보고 전반엔 열렬한 환호를 했지만 후반은 내내 야유를 보냈다. 앞서 주최 측은 “호날두가 45분 이상 출전한다”고 공언했지만 새빨간 거짓이었다.

호날두는 경기에 앞서 열린 팬 미팅과 사인회에도 컨디션 조절을 이유로 불참했다. 8시에 시작하기로 했던 경기는 유벤투스의 지각으로 50분이나 늦게 시작했다. 여기에 호날두가 결장하게 되면서 관중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관중들은 후반 들어 호날두가 전광판에 잡힐 때마다 야유를 퍼붓고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의 이름을 연호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중국 언론은 “한국 팬들이 느낄 비참함에 비해 중국 축구 팬은 훨씬 행복해하며 몰래 웃고 있을 것”이라고 한국 팬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호날두가 이틀 전 중국에서 치러진 인터밀란과의 게임에서 90분을 풀로 소화한 것을 빗대서 한 말이다.

저녁식사 후 시합이 시작되길 학수고대하며 일찌감치 TV 앞에 진을 친 필자도 게임 전부터 부아가 치밀었다. 비싼 돈을 지불한 6만 5천명의 관중은 물론, 시청하고 있는 수십 내지 수백만의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친선경기라고는 하나 엄연한 국가와 국가(대한민국과 이탈리아) 간의 계약에 의해 이뤄진 공식행사가 아닌가. 호날두의 얼굴 표정을 보니 더 화가 났다. 얄미워 보여서인지 몰라도 우리를 깔보는 모습이었다. 자기가 마치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듯.

다음 날 보니 여기저기 뉴스에서 분개하며 강력하게 항의하는 내용 일색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계약 불이행은 철저히 따져야 한다. 유벤투스는 30여명이나 되는 세계정상급 선수들로 이뤄진 팀이다. 호날두 개인 팀이 아니다. 이날 경기엔 전설적인 골키퍼로 불리는 부폰도 나왔고, 내게도 익숙한 이과인, 만주키치, 피아니치 등도 아주 열심히 뛰었다. 오히려 후반전의 K-리그 팀은 거의 외국인 선수로 꾸려졌다. 솔직히 그게 더 속상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우리나라 선수들이 경험 못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또한 이날 중계를 독점한 K 방송사는 계속 호날두를 비춰가며 한 개인에게 야유가 가도록 분위기를 유도한 건 아닌지.

다음날 류현진 야구경기를 보면서 찜찜한 마음을 날려보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팽팽한 투수전 양상으로 흘렀고 1대 1 동점 상황에서 내려와 결국 류현진의 대기록은 다음으로 기약해야 했다.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으로 방어율은 1.7점대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 정도면 아주 잘 한 것이다. 지금 국민은 류현진에게 너무 높은 기대감을 갖고 있다. 사이영상에 대한 희망을 크게 부풀리는 측면도 있고 게임에서 볼넷을 내주면 큰일 난 것처럼 난리를 친다. 이래선 부담감만 커진다. 어느 타이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류현진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던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믿고 기다려주자. 열심히 박수치며 응원하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기대치를 마구 높이면 나중에 허탈감만 커질 것이다.

이동구 본보 독자위원장 /한국화학연구원 RUPI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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