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긴
궂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7.2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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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울린다. 남편 번호가 휴대전화기 액정화면에 뜬다.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평상시와 다른 상황에 얼른 전화를 받는다. 나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달리 톤이 낮고 작다. 남편은 궂긴 소식을 전한다. 예전부터 알던 선생이 갑자기 생을 마감했노라 읊조린다. 사는 곳이 다르니 만남이 뜸한 것은 정한 이치, 남편은 언젠가 꼭 만나자 약속했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다고 더 아쉬워했다.

궂긴 당사자는 남편의 오래된 벗이자 선생이다. 남편과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지만, 남편이 마음으로 챙기는 분이다. 언젠가 남편은 그 선생이 궁금한 모든 것에 답을 준 사람이라고, 선생을 만나 함께 공부하고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노라 말했다. 그런 선생이 갑자기 병을 얻어 이승을 떠났다니 허망하고 애달팠다.

술자리에서 선생은 “복사꽃 능금 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로 시작하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낮은음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왠지 선생의 음성과 잘 어울렸다. 외나무다리가 원수가 만나는 살벌한 곳이 아니라 연인이 만나는 반갑고 즐거운 곳이라는 반전은 이 노래의 묘미 중의 묘미라 생각한다. 이후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선생이 떠올랐는데 이제 선생의 육성으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는 참으로 많은 것을 앗아간다.

오래전, 선생이 잠시 부산으로 근무지를 옮겨 지낼 때 일이다. 다른 일로 부산에 갔던 우리 부부는 선생과 만나 동래 어귀쯤에서 복국을 먹었다. 선생은 특유의 능변과 재담으로 자리를 가득 채웠다. 몇 순배 술잔이 돌았을 무렵, 남편과 선생은 장소를 바꿔 술자리를 갖기로 하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이슥해서야 불콰한 낯빛으로 돌아온 남편의 표정은 다른 어떤 때보다 밝고 빛났다. 이후 여러 차례 만남을 할 때마다 선생과 남편은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비슷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탐구하는 동반자처럼 보였다.

남편은 이튿날 조문하러 올라가면서 검정 양복을 마다하고 평상복 차림을 택했다. 뭔가 형식적인 조문보다는 그저 만나서 술 한 잔을 걸치고 읊조리듯 노래를 흥얼대던 시절처럼 선생을 만나고 싶었을 게다. 검은 상복으로 이승을 떠나는 선생에게 예를 다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영원한 이별 앞에서 지루하고 고루한 일상을 깨고 문득 만나는 반가움을 표시하고 싶었으리라. 외나무다리에서 그리운 이를 만나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런 남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함께 다녀올까 생각도 했지만 남편에게 문득 혼자만의 시간을 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을 오가는 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선생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채우길 바랐다. 나는 잘 다녀오라는 말로 선생의 마지막을 대신했다.

태어나서 자라고 병이 들어 죽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지만 누군가 생을 마쳤다는 소식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내던졌다고 일갈하던 칸트의 생각을 차치하고라도 생명은 언젠가 쇠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니 왜 아닐까.

남편이 돌아오기 전 한 정치인이 목숨을 버렸다는 뉴스가 떴다. 정치 풍운아라느니 굴곡 많은 삶이라느니 저마다 떠든다.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는 수많은 말이 무에 소용일까? 부질없고 헛된 일이다. 죽음 앞에서는 침묵이 제일이다. 속으로 생각하는 일이 우선이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언어가, 말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뉴스를 보면서 또 한 번 생각한다. 뭇 정치인들의 말의 잔치 속에서 죽은 정치인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오래전부터 선 곳과 눈길이 달랐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많음에도 말이다.

하고 싶은 노래, 몸담고 싶었다던 연극판을 마다하고 정치를 일삼은 이의 끝은 결국 스스로 삶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타인의 삶이란 역시 물속에서 흐르는 땀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것. 문득 노회한 시인이 쓴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망각을 졸업하고 빨랫줄 위의 셔츠처럼 빈손이다.’

<사족> 선생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여전하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직 선생은 살아 움직인다. 몇 장의 사진을 되풀이해서 보는 일은 그래서 더욱더 궂기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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