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시네에세이] 하쿠나 마타타! 인생 뭐 있어!
[이상길의 시네에세이] 하쿠나 마타타! 인생 뭐 있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7.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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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1994년이었다. 지독하게 더웠던 그해 여름은 군 입대 문제로 고민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고시 패스를 꿈꾸는 대학 2학년생이라면 당시 누구나 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여름방학이 시작됐지만 마음은 무거웠고, 기분전환을 위해 고향에 내려오다 극장에 먼저 들러 영화를 한 편 보게 됐는데 그게 바로 디즈니의 첫 창작 애니메이션인 <라이온 킹>이었다.

딱 스무살이었다. 아직 학생이었지만 스물을 넘기니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밤잠을 설칠 정도였는데 먼저 군대를 갖다온 뒤 마음 편하게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입대를 늦춰가며 도전부터 해볼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사실 내 마음은 후자 쪽이었다. 그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군대 가기 싫었거든. 하지만 그랬다가 실패했을 땐 자칫 인생이 꼬꾸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감히 용기를 못 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보통 이 타이밍에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난 공교롭게도 <라이온 킹>을 보고 전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랬다. 그해 11월 난 입대를 했다.

사실 <라이온 킹>을 처음 보고는 깜짝 놀랬더랬다. 만화, 즉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깊이에 탄복했던 것.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을 지배하던 사자왕 무파사(제임스 얼 존스 목소리)의 대를 이어 왕이 될 운명의 어린 사자 심바(조나단 테일러 토마스 목소리)는 자신의 실수로 아빠 무파사가 세상을 뜬 뒤 방황하게 된다.

사실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렸던 삼촌 스카(제레미 아이언스 목소리)의 계략에 빠진 것이었지만 죄책감에 고향으로부터 멀리 도망 나온 심바는 계속 괴로워했다. 그 때 심바 앞에 나타난 친구들이 바로 티몬(네이단 레인 목소리)과 품바(어니 사벨라 목소리)였다.

티몬은 미어캣이었고 품바는 멧돼지였다. 얘들이 열일을 하는데 그들이 심바에게 가르쳐준 삶의 철학이 바로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였다. ‘걱정이나 근심은 모두 떨쳐버려’라는 뜻의 하쿠나 마타타로 인해 심바도 마침내 죄책감에서 벗어나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용기도 얻게 된다.

그 시절 ‘하쿠나 마타타’라는 대사는 영화의 인기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었다. 영화를 본 나도 당시 그 대사로 인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나치게 심각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결국 입대를 선택하게 됐던 거다.

사실 아빠 무사파를 죽게 만든 건 장차 왕이 될 거라며 들떴던 심바의 치기어린 행동 탓이 컸다. 목표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나 역시 당시 잘 갈아놓은 한 자루의 뾰족한 송곳 같았고, “하쿠나 마타타”라는 주문은 마법처럼 무거웠던 내 마음의 짐을 덜어줬다. 그러니까 딱 이 마음이었다. ‘까짓 거 좀 편하게 가지 머. 인생 뭐 있어?’ 그러고 25년이 지났고 난 며칠 전에 실사화가 돼 개봉한 <라이온 킹>을 다시 보게 됐다.

솔직히 작품 자체만 봤을 땐 실망이 컸다. 특히 아쉬웠던 건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인 멧돼지 품바와 미어캣 티몬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았다는 것. 내게도 “하쿠나 마타타”라는 주문을 걸었던 그 둘의 모습이 원작에서는 귀엽고 친근하게 묘사됐지만 이번 실사 영화는 실사라서 많이 어색했다.

쉽게 말해 원작에선 둘 다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실사에선 어른 같았던 것. 모습이 어른이니 원작처럼 까불어도 흥이 안 나더라. 실사에서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다 그랬다. 만화가 동심이라면 실사는 그렇게 어른들의 세계 같은 게 아닐까.

남자에게 있어 군대는 삶의 이정표 같은 거다. 군대를 갖다 오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고마움도 알게 되고, 국방의 의무까지 마친 만큼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랬다. 군대를 제대한 뒤 내 삶도 만화에서 실사로 바뀌었다. 원작에서는 산양들의 대이동에 깔려 죽는 무파사의 모습이 슬펐지만 그의 아픔만큼은 다소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실사판에서는 현실 아픔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실사는 만화보다 더 잔인하다. 어른들의 세계가 아이들의 세계보다 더 잔인하듯이.

1994년 그 때, 안전빵으로 입대를 먼저 선택했지만 그 후로 내 삶은 몇 차례나 꼬꾸라졌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더라. 그렇다면 그 시절에 입대가 아닌 도전을 먼저 선택했다면 달랐을까? 천만의 말씀! 아마도 같거나 더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받을 고통’과 ‘내가 떨 지랄’은 태어날 때 이미 총량이 정해진 듯하다. 어라? 다들 고통 안 받고 지랄 덜 떨려고 사는 게 인생의 모토 아니던가? 하지만 애초에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처럼 이렇게 한번 외쳐보시는 건 어떨지. “하쿠나 마타타! 인생 뭐 있어!”

1994년 7월9일 개봉. 러닝타임 89분. <이상길 취재 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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