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의 자연산책] 하늘을 능멸하는 꽃
[조상제의 자연산책] 하늘을 능멸하는 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7.23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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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이 없으면 어찌할 뻔 했어요? 이 꽃이 없다면 삼복염천을 어떻게 보낼 수 있어요? 천지가 신록으로 넘쳐 지쳐갈 때 주홍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꽃이 있습니다. 삼천리강산에 무궁화는 화려한 꽃 보기가 쉽지 않고, 수국은 추운 겨울에 꽃눈이 얼어버리니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꽃은 이 꽃입니다.

어느 시인은 이 꽃이 하늘과 염천을 능멸하고 붉은 웃음을 띠며 색정과 요염을 듬뿍 간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능멸할 능 : 凌. 하늘 소 : ?. 능소화(凌?花). 하늘을 능멸하는 꽃.

능소화는 하늘을 업신여기며 줄기의 마디뿌리로 담장도 타고, 나무도 타고, 벽도 타고, 전봇대도 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주홍, 주황색 꽃을 세상을 향해 토해 냅니다.

2008년 모 학교에 교감으로 있을 때 학교 숲 시범학교를 했습니다. 교문 주변과 교사 뒤편 펜스에 능소화 10여 그루를 심었습니다. 기다란 장대에 수형을 잡은 것들이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능소화 꽃가루에 갈고리가 있는데 이것이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무를 한두 그루도 아니고 여러 그루를 교내에 심었으니 여기저기서 항의 전화가 옵니다. 아직도 인터넷엔 능소화 꽃가루에 독이 있니, 벌레가 있니, 갈고리가 있니 하는 속설(俗說)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아마 학교에서 능소화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이러한 속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여 년 전 학교에 심었던 그 능소화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금도 7월이면 아름다운 주홍빛 꽃을 피우며 아이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능소화 꽃가루 눈에 들어가도 실명위험 없어요.”

2015년 7월 산림청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연합뉴스에서 능소화를 보도한 뉴스 제목입니다. 국립수목원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능소화 꽃가루를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관찰하고 조사한 결과 능소화의 꽃·잎·줄기·뿌리 등에는 세포독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능소화 꽃가루는 표면에 가시 또는 갈고리와 같은 돌기가 있는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을 하고 있어 사람의 눈에 들어갈 확률이 낮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피부나 망막을 손상시키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능소화를 양반꽃이라 하고 상민들이 이 꽃을 심으면 불러다 곤장을 쳐 심지 못하게 했다는데, 하도 꽃이 아름답고 품격이 높으니 양반나리들께서 자신들만 독차지하려고 헛소문을 낸 것이 아닐까요.

오늘도 10여 년 전 능소화를 심었던 그 학교에 전화를 하니 교장선생님께서 능소화 독성을 이야기하시면서 이를 캐서 버려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기우(杞憂)입니다.

아름다운 꽃 치고 전설 하나 없는 꽃이 없습니다. 전설은 억울한 죽음이 승화돼 예쁜 꽃으로 피어납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 좌절되어 죽어서는 꽃이 됩니다.

옛날 어느 궁궐에 ‘소화’라는 아름다운 궁녀가 있었습니다. 우연히 임금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게 됩니다. 그녀는 빈의 자리에 오르지만 임금은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습니다. 임금에 대한 연정과 그리움에 지쳐 그녀는 병이 들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임금을 처음 만났던 담장 아래 묻히게 됩니다. 이듬해 그녀가 묻힌 자리에서 꽃이 돋아나 담장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능소화라고 부르고, 그녀의 혼이 꽃이 되어 죽어서도 임금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능소화는 못다한 사랑이 한이 되었을까요?

소화는 하늘을 능멸하며 높이높이 담장을 타고 올라갑니다. 고개를 쭉 내밀고 하염없이 님을 기다립니다. 주홍빛 진한 화장을 하고.

조상제 범서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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