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존재하는 것은 오늘일 뿐
다만 존재하는 것은 오늘일 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7.08 2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쩌면 겨울과 여름 사이에서 점점 짧아지는 봄날이 끼어있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지나간 것은 다 짧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던 날들이 마치 비온 뒤 안개 걷히듯 사라져갔다. 그런 사이에서도 3.1만세의거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역사의 바탕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렇듯 건재하고 있음을 되새긴 날들이 많았다. 반년의 마지막 날에 판문점에서 있었던 북미 정상 번개가 전쟁종식과 평화선언이라는 희망으로 읽혀짐이 참 반가웠다.

봄날은 늘 그렇듯이 그냥 오지는 않았다. 비단 꽃샘추위만이 아니라 황사나 오존층 문제보다 더 심각한 미세먼지가 겨울 끄트머리에 매달려서 기승을 부리니 에너지정책에 획기적 변화를 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산불은 올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듯이 강원도 일대는 불이 날아다니면서 삼림을 태워버렸다. 이런 와중에서도 좋은 일들이 좀은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자주 산행 길에 나섰고, 친구들과 사흘 동안 전국 여행을 다니면서 고희를 자축했다. 두 아들의 지원을 받아 차도 바꾸었으니 칠순을 맞은 축하와 위로는 족하지 않으리오.

이것 참 고약하다 싶은 일도 있었으니 고헌역사공원 내의 조형물들이다. 광복회 총사령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동상에다가 어느 것 하나 정성을 기울인 것이 없었다. 마침 인터넷에 여론이 비등해지자 토론회 자리에서 문제를 공식 제기했고, 글도 써서 비판에 가세했다.

고헌기념사업회가 이 문제에 대해 너무도 미온적이라서 실망이 컸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적시하면서 시정을 요구하고 준공일을 뒤로 미룬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결정적으로는 이상헌 의원이 힘을 보탰는데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반년 동안의 오늘은 매일매일 바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은 많았고, 반기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다. 정원과 텃밭은 살아있는 생명으로 가득 차서 매일 부지런을 떨어야만 했다. 주 2회씩 아내랑 같이 하는 요가는 빠지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할 만큼 좋은 운동이다. 일주일에 한번은 산에 가는데 어울림과 운동을 겸하는 즐거운 날이 되었다. 친구들의 권유로 시작한 파크골프에 집중할 시간이 잘 안 되니 묘책을 찾아야겠다. 이래저래 나다녀야 할 일은 기피하기보다 기꺼이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

재미삼아 하던 텃밭 경계를 넓혔다. 밭을 얻어서 가꾼 마늘과 양파가 제법 되지만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했다. 땅을 좀 더 얻어서 참깨며 들깨, 고구마를 가꾸지만 그냥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더덕과 취나물의 씨앗 발아율이 너무 높아서 많이 솎아내도 여전히 밀식이다. 대문으로 난 통로 한쪽으로 남천 거리를 조성하는데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수탉 우는 소리는 이웃사람까지 잠을 방해하는 민폐고, 알을 품고자 하는 암탉의 집요함이 놀랍다. 잔디밭을 침입한 서양 잔디를 제거하려는 나의 집요함도 아내는 안다.

귀촌 2년차에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집 가까이 작은 도랑에 버들치가 놀고 있어서 통발을 놓았더니 굵은 미꾸라지 몇 마리도 같이 잡혔다. 이웃과 나눈 추어탕 맛이 좋았지만 비린내를 싫어하는 아내의 눈치가 시답잖아서 그 다음에는 손수 매운탕 끓이기에 나섰다. 작은 솥의 절반만큼 물을 붓고, 우거지며 부추와 호박잎 등을 넣었더니 한 솥 가득했다. 감자와 호박도 넣고, 풋고추와 마늘 다진 것에다가 방아 잎과 산초 가루를 투하하니 내가 먹어도 정말 맛이 좋아서 여러 사람과 맛나게 나눠 먹었다.

6월의 가장 큰 관심은 죽순이었다. 대나무는 이제 거의 쓸모가 없다. 그래서 죽순은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고 끊어서 버리기 바쁜 집도 있다. 마침 돌보지 않는 대나무밭을 마치 내 것인 양 새벽같이 끊어다가 여섯 솥이나 삶았다. 계절식품인 이 죽순을 두루 맛보시라고 더 많은 지인들과 죽순으로 정을 나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경로당에 가장 많이 갖다드렸다. 감꽃이며 살구, 햇밤 등을 줍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나무 아래서 서성이던 어릴 적의 내 모습을 죽순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혼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짧은 봄날 같은 우리네 인생은 쉼 없이 지나가고 있다. 가끔씩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덜 아문 상처가 눈에 밟히기도 한다.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복병들을 만나기도 한다. 늙고, 병들고, 외로워지고, 죽는 필연과정을 미리 예단하는 일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다만 존재하는 것은 오늘일 뿐이다. 오늘을 열심히 살되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대해지고 고마움 새길 일이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며 살기를 바라노니 부디 욕심내지 말고 평정심을 잃지 말지어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과학연구원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