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선과 악-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사랑, 선과 악-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6.13 2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에서 20대의 싱글맘 리즈(릴리 콜린스)는 바에서 만난 테드(잭 애프런)에게 첫눈에 반해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하지만 테드는 자기 품 안에서 고이 잠든 리즈를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먼저 일어나 일찍 깬 아이와 놀아주며 리즈를 위한 아침식사까지 준비했다. 법대생이면서 핸섬하고 젠틀한 테드의 모습에 리즈는 이내 사랑에 빠지게 됐고, 그와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무렵 리즈가 사는 곳엔 젊은 여자들만 골라 살해하는 연쇄살인마가 출몰했고, 연쇄살인마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친 생존자에 의해 그려진 몽타주에는 테드를 많이 닮은 남자가 있었다.

얼마 후 테드는 경찰의 불심검문에 잡히게 돼 재판을 받게 되고, 남겨진 리즈의 사랑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빠져들고 만다. 특히 같이 있을 때 가끔씩 불쑥 튀어나왔던 묘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리즈는 재판이 길어지면서 점점 지쳐갔다. 마침내 테드가 연쇄살인마임을 확신하게 된 리즈는 마지막으로 그를 면회하게 되고 그 동안 계속 아니라고 했던 테드도 리즈에게 실토하게 된다.

테드와 리즈의 이 이야기는 실화다. 1970년대 실제로 일어나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 사건을 영화화한 것으로 테드는 최소 30명 이상의 여자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테드를 리즈는 진심으로 사랑했고, 테드 역시 리즈만큼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랬으니 리즈는 안 죽였겠지. 그랬다 해도 리즈에게 테드와 보낸 시간은 그가 유력 용의자로 경찰에 붙잡힌 순간부터 끔찍한 시간들로 돌변하고 만다. 하지만 그러고도 리즈는 그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으로 계속 괴로워한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시종일관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연쇄살인마를 사랑할 수가 있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누구든 계획을 세운다. 내가 사랑할 사람의 외모나 직업 등에 대한 대략적인 밑그림이 있다. 물론 그 계획에 연쇄살인마 같은 범죄자는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교통사고처럼 덮치는 사랑은 계획과는 주로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건 리즈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는 테드가 연쇄살인마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고? 당연하다. 하지만 테드가 악마인지 알고서도 리즈는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리즈뿐만이 아니었다. 수감된 후 리즈와 점점 멀어지자 테드는 오랜 여사친(여자사람친구)으로 자주 면회를 왔던 캐럴(카야 스코델라리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역시나 실화다. 평소 테드를 흠모했던 캐럴은 그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그를 사랑한다. 이렇듯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하지만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국 영화는 말한다. 사랑은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사랑이란 게 인간이 만든 도덕이나 질서보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더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처음 남녀가 만나 서로 끌릴 땐 인력의 법칙이 작용한 거라 볼 수 있다.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도 인력에 힘을 보탠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든 마음속에 ‘그 사람’이라는 중력(重力)이 생긴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중력은 존재의 힘이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수혁(이동건)이 태영(김정은)에게 말한다. “내 안에 너 있다.” 중력 탓이다. 그런 중력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뉴턴에 따르면 중력이 야기하는 단위 시간당 물체의 속도 변화량인 ‘중력가속도’는 힘에 비례한다고 한다. 이를 중력가속도의 법칙이라 한다. 그러니까 중력이 클수록 가속도도 빨라진다는 말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할수록 더 빨리 다가가게 된다.

한편 사랑은 끝이 나도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한 동안 계속된다. 바로 하던 데로 계속 하려는 관성의 법칙 탓이다. 테드가 악마인줄 알고서도 리즈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다가 관성의 힘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된다. 우리가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는 것도 도덕보다는 물리학의 법칙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공감하거나 말거다.

사랑에서 선과 악을 걷어내면 비로소 ‘인간’이 보인다. 사실 선과 악은 지구, 특히 인간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구분이다. 우주공간에서 거대한 블랙홀이 행성을 집어삼킨다고, 또 초원에서 사자가 사슴을 잔인하게 잡아먹는다고 그걸 악하다고 할 순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헤어지고 난 뒤 쉽게 다른 사랑을 할 수 있는 거고, 심지어 테드 같은 악마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 <미인도>에서 음탕한 춘화도를 그리다 스승인 김홍도(김영호)에게 들킨 신윤복(김규리)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랑하고 흔들리고 유혹하는 그 마음이 아름다워서..”

2019년 5월3일 개봉. 러닝타임 109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