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의 시계탑
삿포로의 시계탑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6.1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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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바삐 흘렀고 나는 조금 분주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삶이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속도보다 빨랐고 새로이 설정한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느라 꽤 긴장했었나 보다. 이제 조금 안정이 되고 숨이 제법 고르다. 몇 달 전 봄의 끝자락, 조금은 여유로울 유월의 어느 때쯤 혼자 가고 싶었던 곳을 예약 해두었었다. 날짜가 다가오자 왠지 이번엔 꼭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외로움이 자꾸 밀려왔다. 일정을 취소하고 함께 하고픈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삼십 년 전, 푸릇푸릇 모든 빛이 우리 앞으로 쏟아져 내리던 화사했던 시절의 대학 단짝 친구, 그녀가 동행해 주었다. 스무 살을 갓 넘어 주어진 자유, 비로소 홀로 섰다고 생각한 우리는 설악산으로 해운대로 함께 많은 여행을 다녔다. 낡은 추억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는 그녀, 생기발랄했던 여대생 시절로 우릴 돌려놓을 곳은 어딜까. 이십 대 즈음의 여자친구들끼리의 여행지로 가장 선호하는 곳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깝고도 이국적인 자연이 펼쳐진 북해도는 몹시 우릴 유혹했다. 위도가 조금 높은 홋카이도 삿포로의 신치토세 공항에는 구름이 낮고 무겁게 내려앉았고 바람은 세찼다.

하얀 가루눈 덮인 언덕 위에 크리스마스트리 나무 한 그루,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화려하게 수놓인 꽃 언덕, 에메랄드 빛 호수, 연두 잎사귀 흩날리는 하얀 자작나무 숲. 최근 SNS 인사들의 피드를 장식하고 있는 후라노와 비에이가 있는 곳이다. 반 백 년을 넘게 지구별을 어슬렁거린 두 여인에게 딱히 특별하거나 처음인 것이 있기나 한 걸까. 긴 시간을 걸어 서 있는 지금 여기이지만 ‘처음‘이란 말은 누구에게나 늘 간절하고 아련하다.

오월의 라일락 축제가 끝나고 다소 한산한 삿포로의 공원을 거닐다가 문득 예전 남자친구가 잘 부르던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시계탑이 근처에 있다고 손을 이끄는 그녀, 새로운 곳을 보고, 먹고, 느끼지만 정작 사람들은 과거의 추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삼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인연인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이곳에 오면 꼭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먹어봐야 해.” 때가 조금 일러 라벤더 꽃을 피우지 못한 팜토미타 공원에서 아쉬움으로 한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 누가 뭐란 것도 아닌데 그녀와 눈이 동그랗게 마주쳤다. “세상에나 이런 맛이 있어? 이렇게 향기롭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처음인 걸.” 느낌이 좋았다. 이번 여행이 우리들에게 선물할 익숙하지 않은 처음의 맛과 멋은 꽤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예감.

구월이면 첫눈이 내려 다음해 사월에야 녹는 눈 때문에 북해도의 광활한 토지는 버려져 있었다. 정책적인 뒷받침으로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토지들이 주어졌다. 불모지를 개척해 이모작의 경작으로 쉬어가며 짓는 땅의 경계를 구분하는 몇 그루의 나무들이 이토록 유명해지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벤치마킹으로 이루어낸 꽃 정원의 화훼 농장도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 여행지로 로망이 된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조각 천으로 엮어 놓은 후라노의 밭을 패치워크라고 부르는데 자투리를 이어 엮었음에도 결코 비루하거나 옹졸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 그 경이로운 서사와도 닮았다.

후라노와 비에이는 지금부터 봄이 시작이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대설산을 중심으로 꽃을 심으려고 갈아놓은 흙 밭, 드문드문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 그리고 가지를 비틀고 갓 얼굴을 내민 연두 잎들, 어디에서 바라봐도 사계의 모습이 내내 펼쳐지는 풍광은 억만 년의 역사보다 지금 이곳의 하루가 더 경이로울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삼만 년 전 화산 폭발이 있었던 다이세츠산(대설산)국립공원의 협곡을 거슬러 소운쿄 온천 숙소로 향했다. 머리를 한껏 올려다보며 지나던 깊은 계곡 22km에 걸쳐진 주상절리, 그 아래를 범람하듯 쏟아지는 대설산의 물줄기가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는 신의 영역처럼 거대하고 신성하게 느껴졌다.

온천수에 몸을 담근다. 반쯤은 아주 시리게 차갑고 반쯤은 아주 따끈하다. 공평하고 밑질 것 없는 우리의 생(生) 같다. 미끈거리는 초록빛 물, 어디선가 낯익은 한국말이 들려온다. “세상에나, 이제껏 해온 온천은 온천도 아니라더니 이런 온천수는 처음이네!” 그들은 처음이라는 선물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엊그제 여행에서 돌아와 정리하는 사진 속에 웃는 우리의 모습이 긴 시간을 새겨놓은 화석처럼 정지되어 있다. 먼 시간이 지난 뒤 언제이고 호명하면 금세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모습으로. 먹는 것은 생활이고 먹고 싶은 것은 그리움이라 했던가. 일상으로 돌아와 각자의 삶 속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와 나. 다만 치즈 향 농밀하게 입안을 헤집던 처음 맛본 오타루의 케익이 몹시 먹고 싶을 즈음 그녀가 노래 가사를 보내왔다.

‘고이노마찌 삿포로 사랑의 도시/ 시계탑에서 만나 사랑하고/ 쓸쓸할 때 찾게 되면/ 포근하게 감싸주는 애인이고 고향이고/ 고마운 나의 사랑의 마찌 삿포로’





최영실 여행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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