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6.03 2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5년 모내기가 끝나가던 어느 날, 언제나 웃음소리가 넘치는 집이라고 부러워하던 우리 가족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그 때 아버지의 나이는 64세였다. 한동안 내 뱃속의 내장이 다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 죄송스러웠던 것은 평소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불평을 많이 해드렸다는 것이다. 이목구비도 아버지를 닮았기에 유년시절에 외갓집에 놀러 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애란이가 엄마를 닮았으면 얼마나 예뻤겠노.”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닮아 못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 탓을 하곤 했다. 이마가 너무 크다고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늘어놓을 때마다 당신이 외려 이렇게 위로해 주곤 하셨다. “이마가 크면 마음밭이 넓고, 아버지 닮으면 앞으로 잘 산다.”

내 이름은 천애란. 난초처럼 좋은 향기를 세상에 퍼트리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난 이름 덕을 많이 보면서 살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들도 내 이름을 들으면 이미지와 하는 일과 참 잘 어울린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도 이름 잘 지어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아버지 산소에 갔다. 어디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샛노란 고들빼기 꽃이 피어나 나를 반겨주었다. 집으로 오자마자 아버지가 살아생전 좋아하셨던 김영임의 회심곡을 들어보았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듣기 싫고 소음으로만 생각했던 이 회심곡이 요즘은 마음속 깊이 저며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4년 전 김영임이 2002년 월드컵 홍보대사로서 울산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난 아버지를 오시게 했고, 꽃다발과 편지도 준비했었다.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그런 웅장한 소리가 나오는지, 과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창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 후 꽃다발과 편지를 드리고는 아버지가 평생 선생님의 소리를 동경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기념사진을 한 번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좀처럼 팬들과 사진을 안 찍는다던 그분은 사연을 듣더니,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마치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시고 악수를 청하시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김영임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는 다정하게 사진을 찍으셨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해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서둘러 가신 아버지가 가끔은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밤하늘의 별이 되어 내가 어디를 가든 보살펴 주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전을 할 때도 늘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린다. “아버지, 저 운전합니다. 잘 보살펴 주세요.” 하고.

천애란 재능시낭송협회 울산지회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