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을 재해석하다 - ‘악인전’
악(惡)을 재해석하다 - ‘악인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5.2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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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인전' 한 장면.
영화 '악인전' 한 장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는 명실상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건 바로 선(善)과 악(惡)에 대한 재정립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넘어서 인류의 오랜 고정관념까지 뒤흔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선과 악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생각은 <다크 나이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사실 <다크 나이트> 이전까지 인류의 보편적인 생각은 선과 악은 명확히 구분되고, 악은 사라져야 할, 또 없앨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우주 전체가 빛과 어둠으로 양분되고, 종교에서 비롯된 천국(극락)과 지옥의 구분은 사라져야 할 존재로 악을 절대시하기에 충분했다.

그 덕에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도 언제나 선한 주인공과 끝까지 악한 악당 간의 대결이 주를 이뤘다. 물론 그 대결에서 승리하는 쪽은 늘 선이었다. 그래야 한다고 믿으니까.

그런데 지난 2008년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에서 악당 조커(히스 레저)는 경찰에게 잡힌 뒤 배트맨(크리스찬 베일)과의 첫 대면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고담시를 대표하는 선과 악이 마주 하게 된 그 상황에서 배트맨이 “왜 나를 죽이려고 하지?”라고 묻자 그는 어이없어 하며 이렇게 말한다.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너 없이 내가 뭘 하겠어? 마피아 양아치들에게 사기나 치던 인생으로 돌아가라고? 싫어. 넌, 넌 나를 완성시켜(You Complete Me)!”

배트맨이 조커를 완성시킨다고? 아니 각자 선과 악을 대표하며 서로가 적인 관계에서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사실 조커가 내뱉은 ‘You Complete Me’라는 대사는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1997년작 <제리 맥과이어>에서 주인공 제리(톰 크루즈)가 도로시(르네 젤위거)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사용돼 유명해진 대사다. 그렇다면 그 영화에서처럼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커가 배트맨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는 건 적어도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는 담고 있지 않을까. 배트맨이 자신을 완성시킨다고 하니. 하긴.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은 더욱 빛난다.

또 악이 있어야 선도 더욱 빛이 나기 마련.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악당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한 주인공은 더욱 돋보이고 이야기도 재밌어진다.

악당인 조커는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 그저 그런 악당이었던 조커는 정의의 사도로 배트맨이라는 절대선이 고담시에 등장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자 설레기 시작한다.

드디어 자신의 할일이 생겼다는 듯이 절대악으로 거듭나 도시를 파괴하며 혼란과 공포로 몰아간다. 배트맨이 빛이라면 어둠이었던 조커는 그게 자신의 할일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파괴가 있어야 창조가 존재하고, 창조가 있어야 파괴도 할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이 우주가 빛과 어둠으로 이뤄졌듯 인간세상에서 대립하는 선과 악도 영원히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건 우주를 닮은 인간의 내면도 마찬가지. 조커가 배트맨에게 날린 “넌 나를 완성시켜”라는 대사의 의미가 이제 좀 제대로 와 닿으시는지. 아무튼 <다크 나이트>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선과 악, 특히 악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지게 됐고 얼마 전 개봉한 이원태 감독의 <악인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악인전>을 이끌어가는 세 주체는 강력계 형사인 태석(김무열)과 조폭 두목인 동수(마동석), 그리고 연쇄살인마인 경호(김성규) 세 사람이다. 태석은 형사인 만큼 역할 면에서 선한 존재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감독은 태석을 결코 선한 존재로 그려나가지 않는다.

범인을 잡으려는 그의 노력은 선한 의지보다는 집착에 가깝고 그 과정에서 악행도 많이 저지른다. 조폭 두목인 동수는 이미 사람도 몇 명 죽인 악당이 맞지만 시도 때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 경호에 비하면 선한 편이다. 결국 세 주인공은 모두 악당이고 제목처럼 영화는 악인들 간의 피 터지는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제목으로 ‘선인전’보다는 ‘악인전’이 더 그럴듯한 건 분명하다.

사실 냉혹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에서 악인이 될 수밖에 없다. 살인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을 짓밟고 일어서는데 다들 혈안이 돼 있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꿈은 잘 없다. 현실도 악인전인 셈. 사실 우주의 90%도 어둠이다. 그래도 <악인전>의 결말은 좀 더 선한 쪽이 승리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전두환이 아직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현실에선 ‘케이스 바이 케이스(건별로 다른)’인 듯.

하지만 현실에서도 온통 어둠으로 덮인 밤하늘을 바라볼 땐 우린 빛을 먼저 찾는다. 그게 달빛이든 별빛이든. <악인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쁜 짓을 일삼던 조폭 두목 동수가 버스 정류장에서 우산이 없는 어린 학생에게 자신의 우산을 건네는 장면이다. 현실이든 영화든 아직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2019년 5월15일 개봉. 러닝타임 11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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