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것-‘미성년’
어른이 된다는것-‘미성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5.1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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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성년' 한 장면.
영화 '미성년' 한 장면.

학창 시절 즐겨봤던 만화 가운데 박산하 작가의 <진짜사나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대략 90년대 초반이었는데 인터넷이 낯설었던 그 시절 우리나라 만화계는 ‘아이큐 점프’와 ‘소년 챔프’라는 양대 코믹스(만화잡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아이큐 점프를 대표하는 연재만화가 <드래곤볼>이었고, 소년 챔프에서는 이젠 전설이 된 <슬램덩크>가 연재되고 있었다. 모두 일본 만화였다.

그런데 기라성 같은 일본 만화의 공세 속에서도 국산 만화로 큰 인기를 누리며 자존심을 지켰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됐던 <진짜사나이>였다. 학원액션물로 학교 짱들 간의 대결이 큰 재미를 선사했는데 그 때도 느꼈지만 그건 단순한 재미 이상이었다.

나름 깊이가 있었는데 학교 짱들 간의 대결은 대를 이어가며 부정부패를 일삼아온 우리 사회 귀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 정신을 담고 있었고, 일그러진 교육현장의 현실 속에서 장차 어른으로 성장해갈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길을 제시했었다.

실제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책의 앞표지 뒷면에는 작가의 이런 조언이 적혀 있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착한 사람으로 칭찬받고 생활은 언제나 편안합니다. 하지만 그런 어른들은 편안하거나 걱정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우울한 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우리들의 길이 있고 우리들 각자에겐 ‘제갈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우리 모두 함께 가는 제갈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친구입니다.” 사실 만화 속에서 한강고 1학년 짱이었던 주인공 이름이 바로 ‘제갈 길’이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에 꽤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뜻. 그 때 당시에도 그랬지만 난 책장 첫머리에서 펼쳐졌던 작가의 이 멘트가 가슴에 많이 와 닿았었다.

막 대학에 입학했던 그 시절, 아이라고는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완전한 성인이라고도 볼 수 없었던 ‘미성년’으로서 내 앞에 곧 펼쳐질 길이 주인공 이름처럼 멋진 ‘제갈 길’은 아닐 거라는 걸 아마도 미리 짐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랬다. 나 역시 우울한 그 길을 피하긴 어려웠다.

그건 영화 <미성년>에 등장하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대부분 우울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그려진다.

부부인 대원(김윤석)과 영주(염정아)에겐 고교 2학년의 딸 주리(김혜준)가 있었다. 일상에 지쳐갔던 대원은 어느 날 싱글맘으로 홀로 딸 윤아(박세진)를 키우고 있던 미희(김소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미희는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되고, 그 사실은 곧 대원과 미희 가족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참. 주리와 윤아는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다.

아빠의 불륜을 알게 된 주리가 따지기 위해 윤아를 옥상으로 불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아이는 어른을 동경하지만 아이는 가끔 어른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사실 어른의 삶이란 게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른의 삶은 꿈이 좌절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소년의 꿈은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저씨의 고단한 일상으로 추락한다.

이젠 모험보다는 안정을 더 찾게 되고 삶은 그저 그런 일들의 반복일 뿐이다. 그나마 새로운 거라곤 쾌락 뿐. 성공은 먼 이야기다 보니 주로 술과 담배, 혹은 섹스에 빠져 산다.

가끔은 가정이 있어도 새로움을 찾아 바람을 피기도 한다. 대원이 그러했다. 그런 대원에게 처인 영주는 “사랑이야? 성욕이야?”라고 묻고, 미희에게는 “유부남인 줄 알면서 왜 그랬냐?”고 따진다. 그러자 미희는 이렇게 말한다. “바람 한 번 피워보세요. 그게 생각대로 되나.”

그러거나 말거나 대원과 미희 사이에는 아기가 생기고 말았다. 태생은 비난에서 시작됐지만 인큐베이터 안에 누운 아기는 한없이 순수하고 예쁘다.

하지만 엄마인 미희는 대원의 사랑만을 갈구하며 아기는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고, 아빠인 대원은 가정을 다시 지키기 위해 충격 먹은 영주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새 생명이 태어났지만 어른들은 우울하긴 다들 마찬가지. 그런 한심한 어른들 뒤로 아직 순수한 주리와 윤아만이 새 생명의 곁을 지킨다.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있는 조그마한 남동생을 보며 윤아가 말한다. “인생 빡세다. 너 준비는 됐어?”

어릴 땐 어른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보니 나 역시 아직 미성년인 것 같다. 자주 우울하고 불완전하다. 뭐. 다들 비슷하겠지만. 그래서 주리와 윤아의 다소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은 그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어느 새 친구가 된 둘은 잠시 인큐베이터에 있다 곧 세상을 뜬 남동생을 화장한 뒤 남은 분골을 우유에 타서 함께 마신다. 잠시 살다 간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건 어른이 되기 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인생 열라 빡세다. 부디 건투를 빈다.

2019년 4월11일 개봉. 러닝타임 9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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