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특별기고]기억으로부터의 배움
[스승의 날 특별기고]기억으로부터의 배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5.14 2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든 학창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선생님이 한 분 정도는 있을 겁니다. 그 선생님은 처음으로 마주한 학교라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선생님일 수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해준 중학교 때의 선생님일 수도, 원하는 진로를 찾도록 이끌어준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일 수도 있겠죠.

오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저희 담임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이셨어요. 고등학교 입시에 무척 예민한, 소위 학군이 좋은 동네의 여자중학교 3학년 담임 자리는 선생님과는 그리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교실에서 밝게 웃으시는 걸 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그러고 보니 저희 반 구성원의 면면 또한 썩 좋지 않았네요. 공부를 잘해서 자기 잘난 멋에 사는 무리가 있었고, 공부와 담을 쌓거나 술, 담배, 외박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탈행동을 일삼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습니다. 한 반의 학생 수가 40명을 넘었을 때였으니 그 외에 조용하고 착한 친구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서너 명의 친구와 함께 첫 번째 무리에 속한 학생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의 종례는 대체로 잔소리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끝났습니다. 그것도 몇몇 특정 친구들을 향한 잔소리였죠. 일반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면서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 친구나 외박을 일삼아 선생님을 학교 밖으로 인도하는 친구가 잔소리 공격의 단골손님이었어요. 저는 ‘담임 선생님은 이 많은 학생들 중에서 저 애들만 눈에 들어오는 건가? 공부 잘하고 사고 안 치는 애들은 신경을 안 써줘도 된다는 건가?’라며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선생님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졌습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는 친구들에게는 선생님이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으셨거든요. 아, 물론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자주 가출을 하는 바람에 선생님이 그 친구한테 시간을 많이 쓰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네요. 열여섯 살짜리 아이가 그런 것까지 이해할 수 있나요. 그저 본인 기분 상한 것만 생각하는 거죠. 우리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을 심하게 차별했다는 기억을 안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도 선생님을 잊고 지냈어요. 잊고 있던 선생님이 떠오른 건 새 학기 시작 후 여러 가지 일들로 상담을 많이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경제적인 이유로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나한테는 누가 이런 관심을 가져줬을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며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라는 고민의 답이 바로 선생님이었거든요.

저는 중학교 재학 중에 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던 학년은 수학여행조차 가지 못했죠. 그전까지는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던 저희 집도 조금씩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동생이 예술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을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를 불러 상담을 하며 물어보셨습니다.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니? 있으면 이야기해도 괜찮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짜증나게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냐고 투덜대며 하교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저를 한 외부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하셨습니다. 덕분에 적지 않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제가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선생님께 제 마음을 이야기했더라면, 선생님은 저를 더 많이 다독여 주셨을 거라는 사실을요. 진심을 다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도 부족했을 텐데 왜 서운한 일들만 기억에 남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잔소리의 단골손님이었던 제 오랜 친구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생님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나처럼 노는 것 좋아하고, 말로만 공부하겠다던 애한테까지 관심을 가져준 건 그 선생님뿐이셨어.”라면서요. 아마도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겠죠.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잔소리하지 않아도 될 학생들이 있는 반면,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는 학생들도 있다는 걸요.

가끔은 중학교에 근무하면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교사로서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동시에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통해 과거의 시간인 중학교 시절을 계속 돌이켜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선생님이 떠올랐나 봅니다.

앞으로도 저는 제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배울 점을 찾아볼까 합니다. 더 나은 교사이자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요. 언젠가는 꼭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정현 남목중학교 교사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