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알게 된 것은 휴학을 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창원에 온 것이었고, 학원 등록을 하러 오다가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을 갈았다는 것이었다. 겉보기엔 매력이라곤 없던 그가 말하는 걸 자세히 들어보니 왠지 신뢰가 가고, 흙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서예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그는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그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편지 한 통이 라일락 꽃잎처럼 내 손에 들어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개봉해 보니 ‘한양에 도착하니 낭자 생각이 많이 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달랠 길 없어 눈가에 이슬이 가득 맺히기도 했다. 우리는 편지로 삼년 여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만날 수 있는 날만을 고대하며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살았다.
어느 해 나의 생일날, 시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가 건네준 선물은 「내 마음이 곱다면, 나 그대 그림자 되리」라는 시집이었다. 어쩌면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제목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만남은 삼 개월에 한 번 정도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전통찻집에서 녹차를 마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도 하고, 아카시아 향기가 전해지는 길을 몇 시간 함께 걷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인연을 엮어가다가 우리는 드디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결혼 후 나는 두 딸을 출산하고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셋째 아기도 낳을까요?” 그때 남편의 대답은 ‘딸 두 명 잘 키우고,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날 남편이 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언제나 나를 배려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기에 난 꿈의 날개를 달 수 있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젖먹이 아이를 업고서 나는 재능시낭송협회 울산지회와 색동회 울산지부에 입회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남들은 아기를 업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컸기에 힘들지 않았다. 지금은 두 단체에 몸을 담은 지 20여년이 되었다. 틈날 때마다 봉사활동과 강의를 하면서 삶의 활력을 찾고 보람도 느낄 수 있음에 그저 가슴이 벅차다.
어느 날 작은 딸이 말했다. “나도 엄마처럼 살고 싶어요!”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람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딸이 보기에도 무척 행복해 보였으리라. 앞으로 이루어갈 나의 꿈들을 상상하며 오늘도 기쁨꽃을 활짝 피워본다.
천애란 재능시낭송협회 울산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