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목욕탕] “1970~80년대, 유권자 호감 얻으려면 목욕 한번이 필수”
[우리동네목욕탕] “1970~80년대, 유권자 호감 얻으려면 목욕 한번이 필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2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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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목욕탕⑫ 울주군 읍면별 목욕탕
1970~80년대 울주군에서는 ‘목욕선거’라 할 정도로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온천 시켜주는 일이 잦았다. 후보자가 유권자의 호감을 얻으려면 목욕 한번이 필수이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울주군민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던 목욕에 대해 읍면별로 살펴보자.

◇가장 먼저 목욕탕이 생겨난 ‘언양읍’

언양읍은 울주군에서 가장 먼저 목욕탕이 생겨났고 목욕업도 타 지역에 비해 활발했다.

50년대 말 언양에는 이미 언양초등학교 사거리 인근에 신달룡씨가 운영하는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신씨의 경우 목욕탕을 경영하기 전 비단 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다. 신씨가 운영했던 목욕탕은 남녀탕이 구분되어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아 한꺼번에 20여명 정도 목욕할 수 있었다.

이 목욕탕 운영으로 재미를 보았던 신씨는 그의 아들 신채우에게도 목욕업을 권해 새마을사업으로 언양면사무소가 언양장터에 목욕탕을 세웠을 때 신채우가 이를 세내어 운영하기도 했다. 이 목욕탕은 이후 언양에 공중목욕탕이 많이 들어서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하고 5년 정도 운영하다가 문을 닫고 말았다.

언양에서 가장 먼저 정식 등록한 목욕탕은 은정탕으로 1973년이다. 이후에도 언양 인구가 늘어나면서 동부리에 백조탕이 1987년 문을 열었고 1997년에는 장수탕과 약수탕이 그리고 2002년에는 언양헬스사우나가 개업했다.

◇인구수 최고 ‘범서읍’ 첫 목욕탕은 2001년

울주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범서읍은 타 지역에 비해 목욕탕이 늦게 세워졌다. 범서읍에 처음 생긴 목욕탕은 2001년 개업한 10월 천상리에 황토탕 헬스 사우나다.

해방 후 범서읍 사람들은 마을 앞으로 태화강 상류가 흘러 태화강에서 목욕을 즐겼다. 입암과 천상리에 살았던 사람들이 주로 선바위 인근에서 목욕을 즐긴데 반해 구영리 사람들은 이 보다 하류인 구영 다리 인근에서 목욕을 했다.

울산에서 초대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수선이 구영다리 인근에서 목욕을 하다가 주민들로부터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는 요즘도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 흘러나오고 있다.

김씨는 2대에서 낙선한 후 3대 총선에서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이 때 주민들은 자유당의 탄압 속에서도 김씨가 이승만 독재정권과 싸워 줄 것을 기대하고 표를 모아줬다. 그런데 김씨가 당선 후 곧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에 입당해 지역민들을 분노케 했다. 여름날 지역구에 들렸던 김씨가 지금의 구영다리 아래서 멱을 감았는데 이때 범서 노인들이 몰려가 태화강 물이 더러워진다면서 김씨를 쫓아내었다고 한다.

◇변두리에서 첫 목욕탕 문 연 ‘두동면’

두동면은 면소재지인 대밀이 아닌 변두리의 봉계지역에 공중목욕탕이 먼저 들어섰다는 것이 특징이다.

새마을 목욕탕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마을 중심지역에 무쇠 솥을 걸어 놓고 목욕을 했다. 봉계 마을은 마을 사람들이 돈을 내어 무쇠 솥을 공동 구입한 후 이 무쇠 솥을 마을 중심부에 걸어 놓고 목욕을 했다.

새마을사업으로 봉계에 목욕탕이 들어선 때가 80년대 중반이다. 목욕탕은 옛 버스종점 인근에 세워졌다.

목욕탕은 마을 사람들 중 보증금을 많이 낸 사람들이 운영했는데 목욕탕 운영이 잘되자 한때 보증금이 200만원까지 올랐다. 그러나 나중에 연료비가 갑자기 상승하고 범서읍의 지잔온천을 포함해 언양과 경주에 온천장이 개발되면서 결국 폐업을 하고 말았다. 이 목욕탕이 문을 닫은 후 한동안 등억온천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차를 보내어 마을사람들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경주와 언양으로 가 목욕을 하고 있다.

글=울산시문화원연합회 ‘울산의 목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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