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傾聽) 두 시간
경청(傾聽) 두 시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2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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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 동안 매일 오후 8시 울산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울산시립무용단의 기획공연 ‘정수(精髓), 기리다’가 펼쳐졌다. 한국무용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김매자(1943~), 배정혜(1944~), 국수호(1948~) 세 분이 이번 공연에 기꺼이 참여했다. 전통무용, 국악, 창작무 등 가무악(歌舞樂)이 중심이 되어 차례로 선을 보였다. 그야말로 인생을 춤으로 살아오신 원로무용인 네 분을 한꺼번에 모신, 쉽지 않은 자리였다. 이러한 공연은 지금껏 울산에서 쉽게 접하지 못했던 것으로, 매우 의미가 깊었다고 생각한다.

첫날은 김매자, 배정혜, 국수호, 김은희(195 3~) 네 분이 중심이 되어 공연했다. 필자도 첫날 ‘울산학춤’으로 공연에 동참했다. 다섯 무용인과 울산시립무용단이 함께한 자리였다.

첫날 공연은 울산시립무용단이 무대를 환하게 밝혔다. 거문고 선율을 타고 한 손에 부채를 쥔 채 단아한 춤사위 ‘부채현금’으로 시작했다. 거문고의 다른 이름 현금(玄琴)의 가락에 맞춰 부채를 손에 쥐고 추는 춤이었다. 그 뒤를 이은 춤은 ‘두루미의 고장 학성(鶴城)’과 ‘생태문화도시 울산’을 동시에 상징하는 새- ‘두루미’의 몸짓과 날갯짓을 흉내 낸 ‘울산학춤’을 필자가 나와서 추었다. 울산시민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찾아주신 네 분의 원로무용인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경사스러움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춤이었다. 울산학춤은 ‘학(두루미)의 걷기, 날기, 깃 고르기 등의 태(態)를 춤으로 승화시킨’ 춤이다.

김매자 선생님은 한 사람의 인생을 철학적이면서 정감 있는 연기로 풀어내는 ‘숨’을 추셨다. 인생의 평생반려자인 춤과 함께한 세월이 실감나게 전해져 왔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리허설과 공연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건강은 선생님이 타고난 춤꾼임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배정혜 선생님은 삶의 희로애락을 정중동의 절제된 미(美)로 담아낸 ‘심心살풀이’를 추셨다. 흥이 유달리 많으신 선생님 역시 진정한 무용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셨다. 국수호 선생님은 남도 계면가락을 바탕으로 춤을 통해 삶의 여정이 짙게 묻어난 ‘남무’를 추셨다. 김은희 선생님은 한국 고전무용의 대표 춤인 ‘승무’를 추셨다. 이번 공연에서는 장승현 사회자의 깨알 같은 해설이 곁들여져 울산 문화인들은 모처럼 뜻있는 예술의 밤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다음날, ‘남원살풀이춤’을 추는 정명희 선생을 만난 것은 내 무용인생의 보너스였다. 정명희는 조갑녀(1923∼2015·남원살풀이춤) 선생님의 따님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춤을 대를 이어 전승하고 있다. 두 모녀는 오랜 기간 필자의 아버지 김덕명(金德明, 1924∼2015·양산학춤)과 교류가 많았고,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정명희 선생은 우리의 한과 멋, 흥을 풀어내는 조갑녀류 ‘남원살풀이춤(일명 ‘민살풀이춤’=긴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춘다 하여 붙여진 춤 이름)’을 추었다.

공연은 밤 열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대화는 끝이 없었다. 모두 피곤할 것 같은데 오히려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듯했다. 어쩌다 보니 ‘외지 무용인들의 어울림 한마당’ 같은 자리가 되었다.

이번 행사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은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뒤풀이 시간은 필자에게 더없이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한국무용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무용계 원로의 귀한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공연을 마치면 다른 일정에 맞추어 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대화의 시간을 모두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뼉을 치고 큰 웃음소리까지 곁들여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두 시간 남짓한 이 시간이 오히려 짧게만 느껴졌다. 무용 공부 10년 한 것보다 더 유익하게 한국무용계의 역사를 귀담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김덕명이 살아계실 때 네 분 모두 친분이 있었던 터여서 자리가 무척 편안하기도 했지만 한국무용사를 짧은 시간에 특강으로 듣는 것 같아 더더욱 기뻤다. 두 시간 이상을 귀 기울여 경청해도 지겹기는 커녕 오히려 시간이 더디게 갔으면 하는 바람마저 생겨났다. 그 무렵 누군가가 “자! 이제 일어납시다!”라는 말을 던졌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응수했다. “지금 몇 시인데…” 모두가 아쉬워했고, 분위기를 즐겼고, 유익했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이날은 울산시립무용단 홍은주 예술감독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원로무용인들이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홍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홍 감독이 그동안 한국무용계에서 보여준 원만함과 지속적인 소통노력을 원로 분들이 묵시적으로 인정해주었기에 가능한 시간들이었다. 홍은주 감독은 이번 무대를 부임 초기부터 생각하고 준비해 왔다고 했다. 울산시립무용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지역 무용계를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지역 무용인과 함께한 것이 무엇보다 잘∼한 일이었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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