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동맹’
‘달빛 동맹’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2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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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이 흐뭇한 달빛에…’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이다. 한자어로 ‘월광(月光)’, ‘월색(月色)’이라고도 하는 ‘달빛’ 만큼 서정성 짙은 우리말이 또 있을까? 그 서정적인 낱말 ‘달빛’을 동서(東西)를 대표하는 영·호남(嶺湖南) 두 도시가 특허라도 낸 듯 선점하고는 보란 듯이 우려먹기에 바쁘다. ‘달빛동맹’ ‘달빛고속도로’ ‘달빛내륙철도’(=광주-대구를 1시간 안에 이어줄 철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달-’은 대구(大邱)의 옛 이름 ‘달구벌’에서, ‘-빛’은 광주(光州)의 딴이름 ‘빛고을’에서 따온 글자인 것이다. 여하간, 지은이들의 빼어난 조어(造語) 감각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들끼리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대구-광주를 2인3각의 끈으로 묶어준 ‘달빛동맹’은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울산시와 경주·포항시가 2016년 6월에 맺은 ‘해오름동맹’이나 중세 유럽의 상업도시끼리 맺은 ‘한자동맹’(Hansa同盟, 13~15세기)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서화합(東西和合)’의 큰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1989년에 태동한 ‘영호남수필문학회’의 창립 동기도 다르지 않다. (전북·부산 수필가의 사적 인연으로 물꼬를 튼 이 수필문학 모임은 1991년의 ‘영호남수필’ 창간을 거쳐 1996년에는 광주-전남-전북-부산-울산-대구·경북 등 영호남 6개 도시를 아우르기에 이른다.)

지금은 거의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영·호남인 사이에는 한동안 서로 등 돌리는 일이 많았다. 그 뿌리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說)이 존재한다. 혹자는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던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를 거론하고, 어떤 이는 백제-신라의 갈등을 들먹이기도 한다. 또 다른 전문가는 지역별 투표성향을 근거로 “한국 대선 역사에서 가장 극명한 지역감정(地域感情)은 김대중-이회창 후보가 대결한 1997년 대선 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 망국적(亡國的) 지역감정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망령처럼 되살아나곤 했다.

“우리가 남이가?”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이 3파전으로 격돌한 14대 대선을 코앞에 둔 1992년 12월 11일, 그 유명한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당시 법무장관이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꺼낸 이 말은 지역감정의 뇌관에 불을 붙인 결정타로 분류된다. 그 3년 후인 1995년 총선 무렵, 평소 ‘영호남 지역감정 허물기’에 남달리 앞장서던 한 지인(당시 부산 사상구 후보)이 그 구호를 유용하게 써먹은 덕분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된 일은 아직도 떨떠름한 뒷맛으로 남아있다. 자극적인 이 선동적 구호가 당시에는 ‘약발 받는’ 특효약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전해진다.

각설하고, 대구시와 광주시는 요즘 ‘참 잘 나가는 사이’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지난 23일 화요간부회에서 “10년째를 맞는 달빛동맹이 민선7기 들어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면서 “대구시와의 상생협력 사업인 ‘달빛동맹’을 비롯해 동서화합을 다지는 교류협력 사업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오는 26일 권영진 대구시장이 광주에서 상생협력을 주제로 특강을 하고 5월 18일부터 운행되는 228번 버스 명명식과 시승식도 갖는다”며 “저도 5월 2일 영호남 갈등 해소를 주제로 대구 경북대에서 특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2·28’은 대구 민주운동, ‘5·18’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의미한다.

같은 날 광주시는 “조달청이 최근 광주~대구 간 ‘달빛 내륙철도’ 건설을 위한 사전타당성조사 용역을 발주했다”고 밝혔다. 앞서 대구시는 매일신문 2017년 9월 20일자 기사를 인용, “광주-대구 고속도로 이름을 국토교통부가 받아들여 ‘달빛고속도로’로 바꿀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울산시로서는 너무나 꿈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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