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사람들은 성실성과 끈끈한 인정을 원한다
지구촌 사람들은 성실성과 끈끈한 인정을 원한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2.0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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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에는 폭설로 길이 얼어 빙판이 되고, 도서지방은 뱃길마저 끊겼어도 주저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갔다. 그렇게 부모형제가 함께 차례를 지내고 다시 발길을 돌려 일터로 복귀하는 우리 특유의 귀소본능은 우리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있는 정(情)의 소산(所産)이다.

둘러앉아 가래떡을 썰고 음식을 만들며 정을 나누는 문화. 한 솥 가득 떡국을 끓여 먹으며 가족애를 느끼고 선조에게 차례를 지낸 뒤 세배하면 덕담에 세배 돈을 안겨주는 문화, 이런 것은 확실히 타 민족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문화인 것이다.

이렇게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우리’라는 넓은 범주의 문화가 차츰 좁아져 득실을 따지는 명분에 실리를 접붙이기까지 해서 오직 나(我)라는 극히 이기적 성향의 사람이 되어 설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름다운 애칭 ‘동방예의지국’이 오늘 이렇게 된 일련의 과정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를 위해하려 조성된 헌병보조제 즉 일본헌병(순사)의 앞잡이의 역할을 들 수가 있다. 이는 오깟비기(岡つ引き)라는 일본전통에서 파생된 것으로 질이 낮은 사람들에게 앞잡이라는 신분과 고자질을 무기로 주어 같은 조선인끼리 반목과 분열을 조장 하였다.

헌병(憲兵) 완장 뒤에 숨어서 개인적인 원한을 앙갚음하기도 했는데 6?25때는 붉은 완장을 권력으로 휘두른 죽창(竹槍)에 많은 선민이 죽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기 지난 지금은 완장으로 부족해서 머리띠까지 동여매고 나(我)와 내편에 득이 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투쟁만능의 국가로 비춰지고 있다. 이쯤에서 한번 되돌아보자! 바쁘게 달려온다고 빠트린 것이 있으면 더 늦기 전에 챙겨서 다시 앞으로 나가야 하니까.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막걸리와 파전이 웰빙(well-being)식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막걸리가 그렇다.

우리에게는 막걸리 한잔과 시래기 한 주먹에 정이 묻어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 믿음이 있었고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가진 작은 것에 만족할 수 있어서 각박하지 않았다. 수돗물 보다 더 맑고 깨끗한 공동우물도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고, 시래기는 자배기에 그냥 담겨져 있었다. 아침저녁 이웃 아낙네가 시래기 한 줌 건져 호박잎에 싸가면서 “순이네 내가 시래기 한줌 가져가네.”라고 하면 “그래 맛이 있을 랑가, 좀 더 가져가지.”하는 화답이 물동이 이고 가는 아낙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곤 했는데 오늘 우리는 담장을 높이 쌓고 그것도 모자라 유리조각을 꽂아 놓았으니 어찌 정이 흠뻑 담긴 시래기 무침이 담을 타고 넘나들 수가 있을까 싶다.

“이리 오너라.” 한마디에 대문이 열리고 생면부지의 식객이 사랑방으로 안내되어 주안상에 하루 밤을 유하면서 밤이 이슥토록 정담을 나누다 떠날 때는 노자 돈까지 얻어 가던 그 때보다, 문이란 문은 다 꽁꽁 걸어놓고도 가진 것을 지키기에는 그래도 밤이 불안한 오늘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시래기 국 한 그릇을 놓고 점심시간 다정한 대화의 분위기를 화폭에 담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구수한 냄새에 독특한 맛하며 오가는 이야기까지를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가 아무리 어려웠고 형언키 힘든 것이었을 지라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지는가 보다.

실시간으로 전해 듣는 ‘지구촌네트웍 한국인’으로 소개된 성공의 바탕에는 한국인만의 성실성과 끈끈한 인정이 깔려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한한 인정하나만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간 ‘죄와 벌’의 작가 톨스토이 에프스키의 “평안 속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고통을 통해서 오는 것, 사람은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말을 되새겨보면서 확신을 가져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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