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내남에서 만난 초계문신 최벽
경주 내남에서 만난 초계문신 최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1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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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나의 일상은 계획적이지 않다. 정해진 약속이 없는 날의 하루는 마음이 가는대로인 것이다. 한 달 여 전 어느 날 나는 불쑥 고헌 박상진 의사의 증손과 점심이나 같이 할 요량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그는 YTN에서 오늘 11시에 경주 내남면에 있는 고헌 할배 묘소 취재하러 나오는데 가야 한다고 했다. 평소 공경하는 어른이니 망설일 것도 없었지만 언젠가 같은 면내에 있는 최벽 묘소 탐방과 후손도 만나보자던 약조를 떠올리며 흔쾌히 동행 길에 나섰다. 내방객들을 반갑게 맞은 고헌 묘비는 강하고 상서로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기자들과 헤어진 우리는 내남면소재지로 갔다. 그곳 이조리는 흔히 ‘가암’으로도 불리는데, 어원은 세 갈래의 시내가 모이면서 갯벌을 이룬다는 데서 나온 ‘개모듬’이다. 이곳이 친정인 우리 할매는 그래서 성명이 ‘최가암’이고, ‘갬듬댁’으로 사셨다. 경주최씨 가암파 집성촌인 그곳은 정무공 잠와 최진립(1568-1636)의 종가가 있는 곳이다. 고헌의 처가인 ‘교촌 최부자’도 가암이 뿌리이고, 그날 탐방했던 질암 최벽(崔璧, 1762-1813)도 가암에서 태어났다. 큰 선비였던 나의 진외증조부도, 아버지의 벗이었던 최영준 한의사도 가암이 고향이다.

점심을 먹고 내남면 안심리로 향했다. 길을 나선 차안에서 이조리에서 먹은 소머리국밥 맛을 되새김하였다. 주방 앞의 ‘음식을 팔지 양심을 팔지 않습니다’라는 글귀를 붙인 주인의 자부심처럼 맛이 참 깊었던 것이다. 세 번이나 찾았던 안심리 길을 더듬거리고 나서야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질암정사(質菴精舍)’는 손님을 말없이 맞았지만 질암의 후손은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거처 한 쪽 벽면에는 문과대과 장원급제 홍패 사본이 걸려있었다. 고헌 후손과 질암 후손은 초면임에도 서로를 반기며 이야기에 막힘이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세 권의 책이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기탁한 질암 유품 도록 두 권과 2014년에 발간한 기증유물 특별전 도록이 탁자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꼭 열람해보고 싶었던 책이었던지라 반갑게 펼쳐들었다. 기탁유품 도록은 유품 하나하나에 모두 해제를 붙여놓아서 잠시 들여다볼 책이 아니었다. 그런데 후손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약 10년간 기증 또는 기탁유품의 대표적인 것을 전시할 때의 도록이 한 권이 더 있다면서 내게 주었다. 오랜 기간의 선대 세의가 있어서 귀한 책을 선물을 준 것이 아닌가 한다.

도록에는 최벽의 핵심 유품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유품들이 34쪽에 걸쳐서 기증유물특별전 도록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패와 홍패, 별급 문기, 《경림문희록》등 하사받은 책, 사헌부지평 고신(告身), 《질암유고》, 수많은 간찰과 관문 등이 그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장원급제 때 선물받은 시헌서(時憲書, 일종의 달력)에 유독 눈이 갔다. 앞뒤 이면의 과거시험 정황 기록들 중 시험 기간 중에 병중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집안사람들이 노심초사했다는 점이다.

최벽의 과거급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762년생으로 다산과 동갑이나 질암은 다산보다 6년 빠른 1783년 가을에 소과와 친림전시(親臨殿試)를 단박에 통과했다. 다산은 1789년에, 울산인 죽오 이근오는 1790년에 문과 대과에 급제했다. 문과 복시는 통·략·조·불(2.0~0.5) 등 4단계로 평가, 사서삼경 7과목 모두 조(0.5) 이상이면 통과한다. 그런데 질암은 전 과목 통(2.0) 평가를 받아 14분 획득에 주역은 곱절로 산정되어 만점인 16분을 받았다. 전(箋)이나 잠(箴) 같은 시권도 우수한 평가를 받아 문과대과 갑과 일인급제 출신자(장원급제)가 되었다.

그러나 최벽의 관료생활은 길지 않았다. 그는 ‘이인좌의 난’ 으로 인한 영남남인 등용금지령이 해제된 뒤 최초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예조좌랑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분주하면 안 될 것을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790년에는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보되어 5년간 일세의 천재들과 더불어 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초계문신 재임기간에 질암은 18장의 은사장(恩射狀, 하사한 물건 목록)을 받는 등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 사후에는 벼슬길을 접고 낙향하였다. 다시 노론 세상이 된 조정은 남인들의 운신 폭이 무척 좁았을 것이다.

질암 최벽은 당대 남인 중 가장 뛰어난 인물에 속한다. 그는 이가환, 정약용, 정약전 등과 함께 정조의 개혁정치에 기여했다. 질암의 6세손인 최상덕은 1,639점의 유품들을 수원화성박물관에 기탁했다. 정조의 신하였던 질암의 유품들을 정조의 도시인 수원에 맡긴 것이다. 그곳에는 남인 거목인 미수 허목과 번암 채제공 등의 유품들도 함께 존재한다. 재주는 내림하는지 《질암전집》등 선조 문집들을 손수 전산화한 선친 최영준도, ‘질암정사’를 짓고 있는 그의 아들도 그 비범함이 놀랍다. 최상덕의 숭조정신이 보다 높은 완성도에 이르기를 기원한다.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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