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랭 사인’ & ‘에키타이 안’
‘올드 랭 사인’ & ‘에키타이 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1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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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대한제국 애국가’ 가사 첫머리다. 황실 의뢰로 곡을 지은 독일해군 출신 ‘프란츠 에케르트’는 그 공으로 태극훈장을 받는다. 1902년 8월 15일에 정식 국가가 되었고, 1904년 5월부터 일선학교에서 가르쳤으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으면서 금지곡이 되고 만다. 공식 국가(國歌) 자리를 훔쳐간 일본 ‘기미가요’도 에케르트가 지은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로 분류된다.

전문가들의 조사·증언에 따르면 우리 애국가는 1900년을 전후로 여럿이 존재했다. 새문안교회 신도들이 지은 ‘애국가’를 비롯해 열 손가락도 넘는다. 그중에서도 8·15해방 직후까지 50년 넘게 살아남은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가사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붙인 애국가가 거의 유일해 보인다.

<찬송가 이야기>로 유명한 이천진 목사(한양대학교회)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가 ‘올드 랭 사인’이었다”고 말한다.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가 한 촌로의 사투리 구술(口述)을 채록해 1788년에 발표한 ‘올드 랭 사인’은 ‘윌리엄 실드’가 오페라 ‘로지나’에 수록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아무튼 우리에겐 <석별의 정>으로도 알려진 이 곡이 한국 찬송가 속에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Father, I stretch my hands to Thee’)란 제목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주목할 점은 우리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1906-1965)에 대한 끊임없는 ‘친일(親日)’ 논란이다. 이 논란에 불씨를 당긴 이는 <친일음악론>과 <인물로 본 한국근현대음악사-음악가 10인의 엇갈린 선택>이란 2권의 유작(遺作)을 남긴 고(故) 노동은 교수(1946~2 016, 민족음악연구회 회장·중앙대 국악대학장 역임)다. 그리고 그 불씨에 기름을 부은 이는 지난 1월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란 저서를 펴낸 이해영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다. 그는 이 저서에서 “안익태 애국가는 ‘기독교, 미국, 서북’, 곧 당시 남한의 주류 네트워크에 올라타 증식되고 있었고, 안익태 신화는 갈수록 메아리처럼 증폭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지대로라면, 놀라운 것은 안 선생의 지능적인 변신술이다. <한국 환상곡(Korea Fan tasy)>의 작곡자(29세이던 1935년에 작곡)라는 기억만으로도 그를 ‘열혈애국청년’으로 여기던 숱한 국민들의 환상(幻想)을 한 방에 날려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여하간 미국에 머물며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던 무렵, 그의 영문이름은 ‘Eak Tai Ahn’이었다. 그러나 나치(Nazi) 치하의 독일로 건너가 유럽 무대에서 활약한 뒤로는 일본식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란 이름으로 문패를 갈아단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의 꼭두각시국가 ‘만주국’의 독일주재 공사 명함으로 ‘유럽 첩보망 독일지부 총책’(출처=미국 전략첩보국·OSS 보고서) 구실을 하던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 일본의 진주만 습격 사흘 뒤부터 머물면서 보란 듯 보신(保身)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비쳐진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에키타이 안’은 나치와 일본이 손잡고 판을 치던 1941~1944년 무렵 나치 점령국만 옮겨 다녔고, 일본 찬양 자작곡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과 ‘에텐라쿠(越天樂)’도 곧잘 연주하고 다니다가 독일 패망(敗亡) 낌새가 짙어지자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건너가 몸을 숨긴다.

이밖에도 그를 둘러싼 비판은 양파껍질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승만-박정희 양대 정권의 눈에 들기 위해 변신한 흔적도 그의 추적자들에 의해 하나둘씩 벗겨지고 있다. ‘안익태 애국가’의 선율과 ‘만주국’ 선율이 몇 군데 비슷한 점을 들어 ‘자기표절’ 주장까지 내놓는 판국이다. 그에 대한 변호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 전하기로 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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