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아직.-‘증인’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아직.-‘증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1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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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증인'의 한 장면.
영화 '증인'의 한 장면.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면서 ‘세계의 변화’라는 걸 겪게 된다.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한 뒤 내가 처음 맞이하게 된 세계는 이러했다. 동네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던 그 세계엔 친구들이 있었고, 만화가 있었고, 딱지, 구슬치기, 운동장, 엄마의 잔소리 등등이 함께 했다.

헌데 정신적으로는 당시 TV나 책을 통해 자주 봤던 만화란 게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다. 로봇태권브이를 시작으로 마징가Z, 그레이트 마징가, 아톰, 은하철도999, 톰 소여의 모험, 들장미 소녀 캔디, 소공녀 세라. 빨강머리 앤, 미래소년 코난, 달려라 꼴찌(독고 탁), 불청객 시리즈 등등. 비록 작은 동네에서 맞이하게 된 다양한 세계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로 착하게 살라는 것.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건 정의(正義)였다. 그러니까 그 때 당시 나의 세계는 온통 정의로웠다. 나름 낭만도 있었다.

듣기는 싫었지만 엄마의 잔소리도 그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남의 물건 훔치지 마라,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라,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사람 되라 등등. 거기다 때가 되어서 가게 된 학교란 곳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의 가르침은 엄마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대략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의 일이었다.

허나 그 정의롭고 낭만적인 세계는 중학생이 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학업에 등수가 매겨지면서 나의 세계는 송곳처럼 점점 뾰족하고 날카로워져갔다. 이제 나에 대해서는 시험 뒤 매겨지는 등수가 모든 걸 말해줬다. 잠시 공부에 미쳐 전교에서 놀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진짜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등수는 곤두박질쳤고, 난 점점 심각해져갔다. 짜더러 불량 학생도 아니었는데 죄인 같았다. 그러면서 그 옛날 정의로 뭉친 주먹, 로봇태권브이나 마징가Z도 점점 잊혀져만 갔다.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간 뒤 다시 낭만을 잠시 즐기기도 했지만 졸업 후 사회로 나오자 어릴 적 그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 세계의 주인은 정의가 아닌 이익이었다. 물론 정의도 여전히 존재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선택의 문제를 떠안겼다. 이익과 정의의 공존은 늘 쉽지 않았던 것. 이미 학창 시절 등수나 합격이라는 나만의 이익에 길 들어져 있었던 탓에 그런 선택의 순간이면 주로 이익을 택했다.

로봇태권브이가 악당들을 향해 힘차게 정의의 주먹을 날리던 그 시절의 세계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젠 그게 당연해졌다. 어디 나만 그럴까.

그건 이한 감독의 <증인>에서 변호사 순호(정우성)도 마찬가지였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뒤 순호는 바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활동하지만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돈에 쪼들리자 신념 따윈 내팽개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간다.

순호는 곧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수 있는 큰 기회가 걸린 사건의 변호사로 지목된다. 그가 할 일은 살인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 그런데 그 살인사건에는 유일한 목격자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지우(김향기)였다.

중학생인 지우는 자폐 소녀였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지우의 증언을 막아야했던 순호는 지우에게 접근하게 되고 그런 순호에게 지우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분명 민변 시절보다 지금의 순호는 덜 좋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엔 돈보다 정의를 더 중요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으니까. 파트너 변호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벌게 될 거라며 기뻐하는 순호에게 아버지(박근형)가 비꼬듯 말한다. “넌 좋겠네.” 아버지의 말은 사실 ‘너만 좋겠네’라는 의미다. 그래도 민변 시절에는 세상을 위해 일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그 옛날 로봇태권브이와 친했던 시절의 내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음은 분명하지 않을까.

자폐에 걸린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만의 세계가 갇혀 산다. 순호는 지우와 친해지기 위해 지우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무지 애를 쓴다.

그런데 그 세계는 과거의 자신처럼 순수하고 정의로웠고,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지우의 질문은 그래서 순호나 우리 모두에게 묵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어른이 돼서 맞이하는 세계란 게 그렇다. 지우처럼 자폐에 걸리거나 바보가 되지 않는 이상은 다들 어릴 적 그 좋은 사람과는 결별하게 된다. 다행히 순호는 지우로 인해 다시 좋은 사람이 된다. 순호에겐 친구 수인(송윤아)이 있었다. 옥탑방에 살면서도 수인은 약자들을 위해 민변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다.

다시 좋은 사람이 된 순호는 길이 달라 잃어버렸던 수인을 다시 찾게 되고, 그녀에게 “저녁은 먹었냐?”고 묻는다. 그러자 수인은 “아직”이라고 답한다. 사실 한 때는 너도, 나도 다들 좋은 사람이었다.

해서 이한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묻는 정확한 질문은 이거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아직.”

2019년 2월13일 개봉. 러닝타임 129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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