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 백수들의 행진
[독자칼럼] 백수들의 행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07 22: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수가 된 지 3년째다. 우리는 같은 직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퇴임을 했다. ‘백수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산이나 도서벽지로, 어떤 때는 특미로 기차여행도 즐기며 건강과 우의를 다진다. 순번제로 돌아가며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경비까지 책임진다. 공휴일을 피해 주중을 택하다보니 어딜 가나 복잡하지 않고 여유로워서 좋다.

지난주는 우중산행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목적지는 울산과 경주 경계지점인 천마산이다. 출발지점에 도착해도 비는 멈출 줄 모른다. 망설임도 있었으나 오후에는 비가 갠다고 하니 우산을 쓰고 산행을 시작한다.

가다가 지치면 내려오면 되고 정상을 꼭 가야만 한다는 이유도 부담도 없다. 이런 것들이 백수의 특권이 아닌가. 요즘은 말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은 스마트폰에서 토론하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산을 오른다. 30여분 올랐을까. 아담한 정자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여기서 쉬어가지 않으면 정자가 욕하지 하며 각자 배낭을 풀어헤친다. 김밥, 두부, 계란, 부추전, 옥수수, 김치말이 등 가지가지다. 자연스레 막걸리 잔이 오가더니 금방 반응이 온다. 술은 참 묘하다. 움츠렸던 마음과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덕담들이 오가며, 닉네임을 부르고 자화자찬 속에 순식간에 서너 병을 비운다. 이윽고 20여분 지났을까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더니 다시 산을 오른다. 그새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안개로 변한다. 산허리를 감싸고 있던 안개들이 흩어졌다가 모였다가를 반복한다. 칠부 능선쯤이나 되었을까. 108 계단이라는 안내표시가 나타난다. 중간 중간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글귀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구체적인 의미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인생살이가 고달프다는 번뇌의 뜻이 아닐까.

힘겨워 위는 보질 않고 계단만 보고 흑흑거리며 걷는다. 가파른 108 마지막 계단을 통과하니 제법 큰 팔각정이 성큼 나타난다. 오늘 목적지는 여기까지라고 한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풍광들은 가히 경이롭다. 새하얀 운무에 가려 산봉우리만 올망졸망하게 보인다. 바다 가운데 흐트러진 작은 섬들로 보이다가도 운무가 걷히면 골짜기들의 본 모습들이 속속 드러난다. 저 멀리에 있는 무룡산과 삼태봉도 먼 바다에 떠 있는 희미한 섬으로 보이다가도 삽시간에 변화무상한 모습들로 바뀐다.

폰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개운하고 날아갈 듯 기분이 좋다. 아름다움은 오래 머물지 않는 법. 아차! 하는 순간에 지나간다. 이제는 하산할 시간이다. 날이 개이니 발걸음도 가볍고 경쾌하다. 터벅터벅 내려가는 하산 길은 많은 것들을 뒤돌아보게 해준다. 어느덧 시내 변두리 허름한 주막집에 닿는다.

오늘도 백미는 역시 하산주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얼큰히 취한다. 주막집 돌쇠마저 우리들의 흥에 취하는지 돈도 안 받고 귀한 전복안주까지 내놓는다. 이제는 술이 술을 부르는 시간이다. 백수들의 행진에는 막힘이 없는지 아무렇게 애기해도 좋고, 나사가 풀려도 좋다. 우리는 자천타천으로 자연인(自然人), 예인(藝人), 법사(法師), 작가(作家)로 닉네임을 만든다. 다들 의미 있고 숨은 뜻이 있다고나 할까. 닉네임이 더 친숙해질 시간이다. 주막집에 이태백이가 다녀갔나. 벽면이 그런 글들로 도배되어 있다.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려면 용서의 징검다리도 꼭 지나야 한다.’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강걸수 수필가·전 북구 송정동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