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US)’ 재미와 의미 사이
‘어스(US)’ 재미와 의미 사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0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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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스'의 한 장면.
영화 '어스'의 한 장면.

조던 필 감독의 <어스>에서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뇽)는 어릴 적, 그러니까 정확히 1986년에 부모와 함께 산타크루즈에서 휴가를 즐긴 적이 있었다.

부모가 한 눈을 판 사이 어린 애들레이드는 혼자서 해변 놀이공원을 떠돌다 ‘유령의 집’에 이끌려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 유리방에서 그만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분신)를 만나게 된다. 그 일이 트라우마가 된 애들레이드는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어른이 된 애들레이드는 남편 게이브(윈스턴 듀크)와 아들 제이슨(에반 알렉스), 딸 조라(샤하디 라이트 조셉)와 함께 휴가를 위해 다시 산타크루즈로 오게 됐다. 그런데 어릴 적 트라우마가 생긴 해변을 갖다 온 그날 밤, 비치하우스엔 빨간 죄수복을 입은 낯선 일가족이 집을 덮친다.

충격적인 건 그 낯선 일가족은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빨간 죄수복을 입고 있었고 말을 자연스럽게 못했을 뿐, 그들은 애들레이드를 비롯해 남편 게이브, 아들 제이슨, 딸 조라 자신들이었다.

여기까지 보게 되면 관객이라면 이제 누구든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도플갱어 같은 낯선 일가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그렇게 흥미나 재미를 유발케 하는 설정 이후 감독은 의외로 한 동안 ‘의미’를 추구한다.

무슨 말이냐면 관객 입장에서 몰입하다 보면 도플갱어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 날카로운 가위를 무기로 원본 애들레이드 일가족을 죽이려드는 복사본들의 악한 모습은 ‘나’라는 매개체로 인해 존재에 관한 심오한 철학을 들먹이게 된다. 영화보면서 의미를 많이 따지는 나는 그랬다.

아무튼 얼핏 생각하기에는 ‘나’라는 존재는 하나다. 그렇지? 나는 나지. 그런데 ‘나’라는 단어 앞에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가령 ‘착한 나’도 있을 수 있고, ‘못된 나’도 있을 수 있다. 그 외 ‘기분 좋은 나’나 ‘우울한 나’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두 같은 ‘나’일까? 그건 또 아니지 않나? 같으면 ‘못된 나’에게 다른 사람이 “평소 알고 있던 너가 아닌 거 같아”라는 말을 할까. 결국 영화 속 복사본은 바로 ‘악한 나’이고 갑자기 나타나 원본을 공격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의 이중성을 비꼰다고 생각했더랬다.

또 제목이 ‘어스(Us:우리)’인 이유도 여러 가지의 ‘나’가 존재할 수 있는 만큼 나도 사실은 Me가 아니라 Us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이 때까지는.

그런데 잠시 후 도플갱어의 출현은 애들레이드 일가만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산타크루즈에는 애들레이드와 평소 친분이 있는 타일러(엘리자베스 모스) 일가도 함께 휴가를 왔는데 그들 역시 복사본들의 공격을 받았다. 아니 좀 더 보다 보니 미국인 모두에게 공격이 가해졌다. 한 마디로 난리가 난 것. 어라. 미국인? 그때부터였다. 영화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사실 타일러 일가는 백인 상류층 가족이다. 반면 애들레이드 일가는 흑인 중산층이다. 난리가 나기 전 해변에서 애들레이드의 남편인 게이브와 타일러의 남편인 조쉬(팀 헤이덱커)가 나누는 대화에서 게이브가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이 이때 되새김질이 되는데 미국인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복사본들은 이젠 미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극빈계층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래서 제목인 Us의 의미도 이젠 ‘United States(미국)’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막판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복사본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길게 늘어선 건 소외 계층을 위한 기부 캠페인으로 1986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Hands Across America)’를 되살린 것으로 현 트럼프 행정부의 빈익빈 부익부 정책에 대해 일종의 항의 퍼포먼스로 읽힐 수 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영화가 끝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됐다. 영화 좀 본다지만 그 정도로 똑똑하진 않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영화는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의미라고 해봐야 인종차별 문제만 살짝 건드렸던 전작 <겟 아웃>에 비해 지나치게 농도가 짙어진 갖가지 의미들로 인해 조금 지쳐간다 싶을 때쯤이었다. 감독은 그런 나를 위해 마지막 한 방을 숨겨두고 있었고, 꽤 충격적인 반전으로 그 동안의 복잡한 의미들을 순식간에 ‘재미’로 바꿔버리더라. 이 감독, 좀 천재인 듯.

의미를 추구하면 무거워지고, 재미를 추구하면 가벼워진다. 사실 마지막 반전의 재미는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의미를 추구했던 나를 조금 반성하게 만들었다.

짜더러 나라를 구하는것도 아닌데 그냥 편하게 보면 되지 뭘 그리 생각이 많았던 건지. 하긴. 그렇기 때문에 오랫 동안 이런 글들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건 또 아니던가. 물론 나도 가벼운 게 더 좋다.

실제로 난 이 넓은 우주에서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 먼지에 비하면 또 참으로 무거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재미와 의미 사이에 뭐가 있냐고? 그냥 답이 없더라.

2019년 3월 27일 개봉. 러닝타임 11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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