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목욕탕] 여관과 겸업한 북구 최초의 영업 목욕탕
[우리동네목욕탕] 여관과 겸업한 북구 최초의 영업 목욕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3.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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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목욕탕⑧ 부산탕과 호계샘물탕 (1)
북구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 ‘부산여관’ 전경. 여관과 ‘부산탕’이란 이름의 목욕탕을 함께 운영했다.
북구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 ‘부산여관’ 전경. 여관과 ‘부산탕’이란 이름의 목욕탕을 함께 운영했다.

 

북구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은 ‘부산여관’이다. 이 여관은 처음부터 목욕탕과 겸업하도록 지었다. 북구에서 최초로 영업한 목욕탕이기도 한 것이다.

수동출신 박정환과 그의 지인 박주천이 동업해 건물을 짓고, 1980년 12월 20일 개업했다. 당시 부산에 살던 박정환은 병무청 공무원, 박주천은 해양경찰이었다. 목욕탕은 박주천의 처가 운영했고, 여관은 세를 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족할 만큼 수익은 나지 않았다. 결국 1년이 채 되지 않아 박정환의 지분을 박주천이 전부 인수해 단독으로 운영을 했다. 박주천은 울산과 연관이 없었지만, 그의 처가 울산 출신이다.

1983년 초 박주천의 처는 이종 동생인 김진호 사장(호계샘물탕)을 찾아와 목욕탕을 임차해 운영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그는 삼화고무(주) 포항직매소에 근무하며 3년 연속 전국에서 영업실적 1위를 차지했다. 본사에서 이런 그를 눈여겨봐 실적이 저조하던 울산으로 인사이동을 시켰다.

처음에는 이종 누나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울산직매소의 실상을 파악한 뒤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점차 회사 생활에 흥미를 잃을 무렵 이종 자형 박주천 내외가 지난 2년 동안의 영업기록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울산역 앞 제일은행 뒤에 있던 사무실에서 전세 2천만원에 월세 40만원의 조건을 제시했다. “장부를 보면 알겠지만, 네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다. 설비와 집기는 그대로 줄 테니 몸만 옮겨라” 또 “네가 하기 싫다고 할 때까지 평생 이 조건으로 운영하라”고 했다. 생각 끝에 그 말을 믿고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돈 등으로 계약했다.

염포동에 신전탕이 개업한 전후였을 것이다. 그가 운영을 시작한 후 거짓말처럼 손님이 몰려왔다. 지인들이 많이 도와줬지만, 우리 사회도 위생관념에 눈을 뜨던 무렵이었다. 한마디로 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마침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고 1982년부터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시작된 시기였다.

목욕탕을 운영하면서 가장 애를 먹은 일은 화목을 구하는 일이었다. 당시 목욕탕의 대다수는 연료로 나무를 사용했다. 폐철도 침목, 산판 등을 수소문해서 구해다 사용했다.

목욕탕을 운영한 지 2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날 이종자형 내외가 찾아왔다. 2년이 됐으니 계약을 경신하자며, “전세금 4천만원에 월세 80만원”을 제시했다. 김진호는 2년 동안 쓴 운영일지를 내어놓고 “이 조건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러면 그만 두라”고 했다.

그는 이종 누나 내외에게 격렬하게 저항을 했다. “당장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남보다도 못한 이종자형 내외를 원망하면서 마음속 깊이 속병이 들었다. 그때 충격으로 아직까지 후유증이 남아있다. 날이 갈수록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어느 날 “차라리 내가 목욕탕을 지어볼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동안의 목욕탕 경영으로 운영 노하우도 생겨 자신이 있었다. 글·사진=울산시문화원연합회 ‘울산의 목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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