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인물 탐구’ 붐
‘지역인물 탐구’ 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3.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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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는 수월한 작업이 아니다. 생존인물 탐구는 더더욱 벅찬 일이다. 섣불리 손댔다가는 ‘생사람 잡은’ 혐의로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탓이다. 다만 대가를 조건으로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代筆作家)라면 예외일 수 있다. 의뢰인의 입맛에 맞게 조리만 잘해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울산에도 그런 분이 있다. 회고록 한 편에 1억 이상 받았다는 작가만 두 손가락은 된다. 그 중 한 분은 회고록 주인공의 성대한 출판기념회에 초대도 받지 못했다며 서운해 했다. 그렇다고 항변할 권리가 그에게는 없다. 어디까지나 거래일뿐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학자나 향토사학가들은 사자(死者) 탐구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유족이나 후손의 반발에 부딪혀 멱살을 잡히거나 법정다툼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대필작가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비난과 비판을 무릅쓰고서라도 ‘진실’과 ‘양심’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려고 애쓴다는 점,

지난해부터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근자에 조명 또는 재조명되기 시작한 울산 출신 인물들이 더러 있다. 이분들은 항일·독립운동, 노동운동에 몸을 바쳤거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굵은 획을 그은 분들이다.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난 박상진(1884∼1921, 항일독립운동가, 광복회 총사령), 동구 일산동 출신 서진문(1901∼1928, 항일·노동운동가)과 성세빈(1893∼1938, 독립운동가, 보성학교 설립자), 울주군 입암리 출신 손후익(1888∼1953, 유학자·독립운동가)과 이관술(1902∼1950,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그리고 동구 방어진이 고향인 천재동(1915∼2007, 문화예술인)이 그분들이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사회주의 계열 인물에 대한 탐구가 특히 그렇다. 뜻있는 이들에 의해 발자취의 상당부분은 베일을 벗었지만 아직은 음지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색깔’에 민감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여하간 최근에는 울주군 양등마을 출신 송석하(1904∼1 948, 민속학자)와 그 집안에 대한 탐구 움직임이 국내 민속학계 일각에서 일어 관심을 모은다. 그 일차적 초점은 그의 부친 송태관의 친일(親日)행적에 모아져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것은 ‘송태관 파헤치기’의 바람이 울산이 아닌 충남 태안 일원에서 불고 있다는 점이다. (울산의 한 저술가는 송태관에 대한 인물평전에서 ‘울산 넘어 부산·태안·파주 등 전국구 부호’라고 묘사한 바 있다.) 며칠 전 논문 준비도 할 겸 울산을 다녀간 한 민속학자는 “충남 태안에서는 송태관을 염전(鹽田)으로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린 ‘친일부호’로 알려져 있다”고 귀띔했다.

다음은 ‘송태관과 송석하 부자의 생애와 행적’이란 그의 논문 초고(草稿) 앞부분이다. “…여러 논문이 발표되었음에도 송석하의 가계에 대한 고찰은 없다. 다만 송석하가 태어난 울산의 향토사가 사이에서 그의 아버지 송태관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을 뿐이다. 학계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문제는 아버지 송태관은 1940년에 사망할 무렵까지도 조선 총독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고… 송석하의 연구활동에서 아버지가 미친 영향력은 없었을까? 본고는 이를 엿보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서울대 인류학과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도 평가되는 송석하와 그의 부친 송태관에 대한 조명은 의외로 큰 파장을 몰고올지 모른다. 송태관에 대한 연구는 그의 뒤를 물심양면으로 받쳐준 울산 서원마을 출신 김홍조(1868∼1922, 학성공원 기증자)에 대한 재조명의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를 ‘인재양성과 대한독립을 위해 살다간 선각자’로 묘사할 정도로 울산에서는 그에 대해 긍정적 정서가 강했던 게 사실이다.

<김정주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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