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을 걷다
봄날을 걷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3.2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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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봄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좋은 계절이다. 하루걸러 변덕을 부리는 날씨와 기온 탓에 몸은 고생이지만 마음은 봄날같이 풀리는 요즘이다. 그런데도 겨울을 다시 날 모양인지 육신의 무게는 나날이 불기만 한다. 해서, 지방도 태우고 지역현안도 살필 양으로 남편과 성안옛길이나 태화강변을 자주 거닐곤 한다. 그런데 남편은 매번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매의 눈으로 사방을 살핀다. 그러고는 나만 듣는데도 열심히 처방을 내린다. 가끔은 짜증도 나지만 내색은 못한다. 나마저 안 들어주면 남편이 서운해 할까 싶어서다.

집을 나서서 옛 다운목장 입구에 다다르니 길이 막혀있다. 토지 소유주가 자물쇠를 채워둔 탓이다. 주위를 살피다가 사람들이 밟아서 생긴 산길로 접어든다. 금세 접어든 목장길은 마치 근대 이전 시대의 모습이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문명의 모습이 일순 사라져서 그렇게 느낀다. 남편은 풋풋한 20대 초반 군복무 때 지나친 적이 있는 휴전선 부근 같단다.

다운목장 길은, 걸어본 이는 알겠지만, 조망이 일품이다. 초지로 조성된 느릿한 구릉길은 마음을 한껏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길을 오르다 뒤돌아서면 멀리 바라보이는 대운산, 문수산과 남암산, 영남알프스 연봉이 두둥실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면 산 이름을 하나하나 알러주는 남편이다. 초지가 끝나면 입화산 오솔길이 나타난다. 전망대가 나오고 이리저리 갈라진 길을 곧바로 걸으면 입화산 참살이숲 야영장과 넓은 주차장을 만난다. 이 숲은 개발제한구역이 만들어준 선물이지만 숲을 찾는 이들 중에는 자가용 이용자도 많다. 그 때문에 녹색에 젖고 봄향기에 취해 한가로이 걷다가는 아슬아슬 스쳐가는 승용차에 놀라고, 가끔 망아지 떼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자전거 무리에 혼비백산하기도 한다.

성안길을 뒤로하고 허기를 때울 요량으로 성남시장으로 내려온다. 남편은 망설임도 없이 시장 부근 단골 짜장면집으로 나를 이끈다. 막상 가게에 당도하니 중국집이 아닌 칼국수집이다. 오래 걷다보니 시장해서인지 칼국수면에 짜장을 올린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먹으면서 들으니 예전에는 식당 자리에 방앗간이 있었단다. 시댁에서도 추수가 끝나면 항상 이곳 방앗간에서 도정을 하고 국수를 만들었단다. 식후 가게 앞 중앙길을 걷다가 중앙3길과 당산4길을 걸어 교동으로 접어든다. 이 두 길은 법정동인 성남동과 우정동의 경계다. 지금은 연못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이 길옆으로는 ‘연지’라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는 연못가로 난 길을 따라 나그네며 장꾼들이 오가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아지랑이 피는 봄날이면 더욱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니었을까.

옛 나그네마냥 상념에 젖어 당산4길을 걷다보면 길 끝에서 장춘로를 만난다. 이 지점이 교동, 성남동, 우정동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 서니 문득 여고시절이 생각난다. 이 자리에 있던 동강목재 뒤편 호떡집은 단골집이었다. 겉은 기름기가 없고 속은 꿀처럼 달콤한 흑설탕이 가득 들어있어서 정말 맛났다. 달콤한 추억도 잠시, 남편이 이곳 어딘가에 울산읍성 서문이 있었단다. 마치 본 것처럼 실감나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당산4길을 나와 장춘로를 건너면 만나는 교동, 북정동 일대는 곧 철거가 된다. 현재 한창 철거 중인 복산지구에 이어 지난 2006년에 결정된 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주택재개발이 본격 추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동, 북정동 재개발구역에는 옛 울산읍성이 포함되어있다. 이번 재개발사업 대상은 동문지와 서문지를 잇는 장춘로 북쪽 주거지역인데, 읍성 성벽 범위는 대략 교동 한결3,4,5길, 북정동 기상대길, 성마을2길, 북정동길이 지나가는 길 주변이다. 곧 이 일대는 아파트공사를 위해 모두 철거된다. 그런데 읍성길 주변은 지구단위계획상 아파트부지가 아닌 녹지다. 장차 개발이 끝난 후 이 녹지는 공원처럼 쓰일 것이니 읍성길을 현 상태로 보존해서 활용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방법은 간단하다, 길과 길에 면한 건물벽, 대문, 담장 같은 것을 지금 모습 그대로 남겨두면 된다. 이 길은 짧게는 지난 한 세기에 축적된 울산 원도심 풍경의 화석으로 영구전시물이 되고, 길게는 600년 울산읍성의 흥망을 보여줄 역사의 현장이 될 수 있다. 남편은, 지장물을 철거하되 이 길만은 남겨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내가 구청장도 조합장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오늘도 우리 부부의 산책과 데이트는 현안 점검으로 끝나고 말았다. 남편과의 나들이는 매번 이렇다.

강혜경 울산 중구의회 의원, 생활환경학 학술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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