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3.10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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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7일부터 10월 18일까지 22일간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가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2005’를 개최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원로 예술인의 초청공연 ‘전무후무(全舞珝舞)’가 있었다.

그해 9월 26일(월) 오후, 서울 타워호텔에는 강선영(81·태평무), 김덕명(81·양산학춤), 문장원(88·입춤), 이매방(79·승무), 장금도(77·민살풀이춤) 등 국보급 춤꾼 5명이 그 다음 달 함께 공연할 것을 의논하기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다. 김수악(79·교방굿거리춤)은 이날 병환으로 자리에 참석지 못했다. 장금도씨를 빼면 모두 무형문화재였고, 평균 연령은 80이었다.

“우리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야 90 다 되도록 고생고생하며 춤출 수 있나”

양산학춤과 태평무, 승무가 나란히 앉고 탁자 건너편에 입춤과 민살풀이춤이 자리를 잡았다. (김덕명씨는 립글로스를 꺼내 입술에 바르고, 이매방씨는 사탕 한 알을 물고 반쯤 돌아앉는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가들이라 아직 공연 순서도 정하지 못한 상태다.)

강선영= (이매방이 주는 사탕을 받으며) 동생은 나 만나면 사탕 주는 게 일이네. 저는 지난 봄에 공연하고 두 달 앓았어요.

문장원= 팔십 노인이, 노구가 한 무대서 춤출 수 있다는 것만도 영광스런 일이지.

강= 내가 김덕명 선생님 춤(양산학춤)을 보고 정신이 번쩍 났던 적이 있어요. 문장원 선생님은 지팡이 짚고 나와서 어찌나 춤(입춤)을 잘 추시던지.

김덕명= 학춤 출 땐 정신부터 학이 돼요. 요즘 춤추는 사람들은 장식에 치중하느라 뿌리를 놓치는 것 같아. 우리끼리야 누가 잘 하나 따져 뭘 해.

이매방= 재작년 암 수술 받고 15㎏ 빠져 44㎏이에요. 근력도 없고. 안 한다고 해도 하도 눈물을 짜길래 왔어요.

문= 난 42㎏이야. 여자만도 못한 중량 가지고 산에도 가고 춤도 춰. 여기 못 나온 김수악 선생은 숨이 가빠 호흡이 안 좋아. 춤도 동작이 뜨고 삐뚤삐뚤한데 그거야 우리가 다 한 가지지 뭐.

이= 문장원 형은 너무 말라서 가슴이 아파.

문= 가볍고 좋은데 뭘.

장금도= 나이로 따지면 내가 꼬래비네(=꼴찌네). 우리 동네에선 내가 제일 늙었는데.

강= 여기선 색시지 뭐.(웃음)

이= 우리 이 공연 잘 해 이북 한 번 갑시다. 이북엔 전통춤이라는 게 없어. 오두방정 같은 춤만 있지.(웃음)

문= 기본을 잘 잡아야 해. 내가 출 입춤은 한국춤의 기본이야. 그게 옳아야 멋도 나지.

강= 궁에서 태평성대 비는 굿을 할 때 춘 태평무도 그래요.

장= 민살풀이춤은 살풀이장단에 명주수건 안 들고 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어요. 그런데 요즘 살풀이춤을 보면 가벼운 것 같아요. 전 무거워야 한다고 배웠는데.

김=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서야 80 넘어 90이 다 될 때까지 고생고생 하며 춤출 수 있나. 앞으로 열흘 몸 건사 잘 해서 무대에서 구부러지지만 마시소들!(웃음) (조선일보 2005.09.28./사람 A30면-국보급 춤꾼 6명 ‘전무후무한 만남’)

박돈규 기자가 사전 모임을 스케치한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2019년 1월 9일, “전북 군산 출신인 고인은 춤으로 이름을 날린 당대 최고의 예기(藝妓)였다.” 장금도(1929·민살풀이춤) 명인이 별세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기사 내용 중 김덕명(81·양산학춤)은 필자의 아버지이다. 김수악(1926∼2009·교방굿거리춤·진주에서 활동), 문장원(1917∼2012·입춤·동래에서 활동), 이매방(1927∼2015·승무·서울에서 활동), 김덕명(1924∼2015·양산학춤·동래, 진주, 양산지역에서 활동), 강선영(1925∼2016·태평무·서울에서 활동), 장금도(1929∼2019·군산에서 활동) 이상 여섯 분은 14년 전‘전무후무한 만남’을 통해 같은 무대에서 함께했다.

그 후 4년, 7년, 10년, 11년, 14년. 장금도를 마지막으로 모두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갔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한다. 예술과 예술가는 그 지역의 얼굴이라 표현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시민이 울산무용계를 큰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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