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목욕탕] 해방 후 문닫은 목욕탕 대신한 ‘천연 목욕탕’
[우리동네 목욕탕] 해방 후 문닫은 목욕탕 대신한 ‘천연 목욕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3.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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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목욕탕 ⑤ 동구 주전마을 천연 목욕탕
주전마을 주민들의 천연목욕탕 역할을 하던 '성골천(운곡천)' 전경. 울산시 12경 중 '강동 주전 몽돌해변' 시작 지점에 위치해 있다.
주전마을 주민들의 천연목욕탕 역할을 하던 '성골천(운곡천)' 전경. 울산시 12경 중 '강동 주전 몽돌해변' 시작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해방 직전 까지만 해도 방어진시가지에는 세 개 이상의 목욕탕이 있었으나 해방 이후에는 1개의 목욕탕만 운영을 했다. 당시 국내의 경제사정도 그렇고, 방어진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이 돈을 내고 목욕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또 유교적 관습 때문에 옷을 훌훌 벗고 공동으로 목욕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주민들의 경우 현금거래의 경제활동에는 익숙지 않아서 목욕탕 건물을 소유하고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실제로 물은 어디서 어떻게 끌어와야 할지, 연료조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사업비용의 투입에 대한 미래의 성과가 어떻게 도출될 것인지 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다가 목욕탕 사업을 포기했다. 1963년께 목욕탕이 다시 개업하기까지 동구는 목욕탕이 하나뿐인 도시였다.

해방이 되고 1970년대에 현대조선소가 들어오기 전까지 동구의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농업과 수산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했다.

이 시기 주전 사람들의 생활은 조선시대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았다. 상마을과 중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엔 큰골의 들판과 봇도랑이 천연으로 깎기고 굽이져서 냇물을 실어다 바다로 흘러 보내고 있었다.

주전의 번덕마을과 새마을 사이엔 사을들이 펼쳐져 있고, 갓골과 홈골의 제법 긴 서쪽의 톳재산 동편을 원류로 하는 홈골 거랑물은 산간계곡을 거쳐서 사을들과 마을 근처의 개울로 흘러와서 주민들의 천연 목욕탕 역할을 했다.

쇠평마을 북쪽의 방령(芳嶺)이라 부르던 성골마을은 옛날 병마를 길을 때에 마을 앞으로 구마성이 지나가서 ‘성골’이라 불렀다. 1950년 이전에는 30여 가구가 산속의 골짜기를 따라 흩어져 살았다.

한국전쟁(6·25) 전후에 빨치산들이 활동하면서부터 마을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밤에는 빨치산이 와서 먹을 것을 요구하고, 낮에는 경찰이 와서 빨치산에게 협조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결국 성골마을 사람들은 산 아래로 내려가라는 국가의 긴급명령인 ‘소개령(疏開令)’을 받았다. 이때 성골사람들은 산 아래로, 일가친척집으로 피난을 가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 골짜기로부터 내려오는 ‘성골천(현 행정명칭: 운곡천)’은 오래된 (구)마성의 이야기와 아그락 할매의 전설을 싣고 아래성골 마을과 주전 새마을 사이의 성골천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이곳이 울산시 12경 중에 ‘강동 주전 몽돌해변’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곳은 주전새마을과 아래성골, 구암마을 사람들의 천연 목욕탕의 역할을 했다.

혹여 주전의 아이들은 명절나기 목욕을 하러 목욕탕이 있는 방어진으로 갈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어른들이 땔나무를 이고 지고 팔러 다니던 길을 걸어서 아이들은 방어진으로 갔다. 방어진에 사는 친척집에 하루 전 쯤에 가서 머물며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글·사진=울산시문화원연합회 ‘울산의 목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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