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목욕탕] 100년 역사의 방어진 공중목욕탕
[우리동네목욕탕] 100년 역사의 방어진 공중목욕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3.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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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울산 최초의 공중 목욕탕 ‘전탕’
1915년 방어진에 설립된 수산회사 하야시카네(林兼)의 직원전용 목욕탕 ‘하리마야탕(はりまヤ湯)’. 지금은 ‘장수탕’이란 상호로 바뀌었다. 사진은 ‘장수탕’ 전경.
1915년 방어진에 설립된 수산회사 하야시카네(林兼)의 직원전용 목욕탕 ‘하리마야탕(はりまヤ湯)’. 지금은 ‘장수탕’이란 상호로 바뀌었다. 사진은 ‘장수탕’ 전경.

 

울산 동구지역은 삼면이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마을이다. 주민들은 항시 바닷가에서 생활하는 탓에 해풍이 안고 있는 소금기와 땀으로 온몸이 끈적거리는 불쾌감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따라서 저녁이 되면 몸을 씻어야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 되는 습성이 있다. 내륙 지역 사람들보다는 다소 이른 시기에 목욕문화가 유입될 수 밖에 없었다.

방어진에 목욕이 일반화된 건 돈을 주고 하는 공중목욕탕인 ‘전탕(錢湯)’이 보급되면서다. 1908년 ‘한국어업법’이 공포되면서 한국 내 거주하는 일본인에 한해 어업권의 인·허가를 허가했다. 이때부터 방어진에는 일본 어민의 이주가 촉발되는데,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일본인 가구 수가 80여 호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방어진 연안에는 근대식 항구와 어선의 접안시설이 건설되고, 어업에 필요한 여러 시설들도 들어섰다.

뒤를 이어 어구상점, 조선소, 일반 생활시설인 시장, 식당, 유흥가 등이 생겨났는데 이때 ‘목욕탕’이라는 대중의 ‘전탕’이 생겨났다. 전탕이란 돈을 내고 목욕을 하는 목욕탕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방어진에는 목욕탕이 3곳이 있었다. 그후 1915년 목욕탕이 9개로 늘어나면서 당시 목욕탕은 방어진의 도시문화를 가늠하는 지표가 됐다.

1915년 방어진에 설립된 나카베(中部幾次郞)의 수산회사 하야시카네(林兼)는 인근에 8세대가 거주하는 핫켄나카야(八軒長屋)라는 사택을 여러 동 지었다. 사택 인근에 직원전용 목욕탕도 들어섰다. 하리마야탕(はりまヤ湯)이 그것인데, 하야시카네 직원전용 목욕탕이었다. 현재는 ‘장수탕’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일본인들은 방어진에서의 모든 사업을 중지하고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그대로 두고 일본으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중에는 평소 영업을 돕던 사람이나 친하게 지낸 이웃사람에게 관리권이나 소유권을 맡겨놓고 떠났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울산읍내의 경우 목욕탕 이야기가 당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계읍장(桂邑長) 담(談). 울산과 같은 넓은 지대에 밀접한 인구를 가진 곳으로서 아직 완전한 목욕탕이 없다는 것은 저 자신도 매우 의아하며, 유감천만으로 생각합니다. 일부 언론이 방어진 같은 곳에도 훌륭한 목욕탕이 두 개 이상이 있다는 것은 읍 당국의 무성의가 아니냐고 질문하는 인사도 있습니다만은 저로서 기탄없는 말을 한다면 방어진과 울산은 과연 모든 점으로 비할 바 아닙니다(중략).”

위의 기사를 보면 당시 울산 읍내에는 목욕탕 자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방어진사람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욕탕에라도 갈 수 있었지만 울산읍내 사람들은 목욕탕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울산 읍내에 목욕탕이 생긴 것은 1940년 이후의 일로 두 개의 목욕탕이 생겨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글·사진=울산시문화원연합회 ‘울산의 목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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