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의사 추모사업, 현창사업으로 승화시켰으면”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 현창사업으로 승화시켰으면”
  • 김정주
  • 승인 2019.02.2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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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고헌(固軒) 박상진 의사 증손


2019 기해년(己亥年)은 100주년 기념행사가 두 번이나 열리는 민족자존의 기념비적 해이다. 100년 전 1919 기미년(己未年)에 일어난 역사적 큰 사건 3·1 독립만세의거(3월 1일)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4월 11일) 모두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맞춰 LH공사가 제막식을 염두에 두고 추진해온 사업이 있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무장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광복회 총사령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울산 생가 주변을 성역화해서 역사공원으로 꾸미는 ‘박상진 역사공원 조성 사업’이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박 의사의 업적을 기리려 세운 생가 뒤쪽의 동상 및 ‘메모리얼 가벽’ 설치 공사. 마무리 단계인 것 같아도 제막식은 추모제가 열리는 8·15 광복절 직전으로 늦추기로 했다. 26일 열린 북구문화원 정기총회가 이를 추인했다.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박 의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날짜가 1921년 8월 11일인 점도 감안이 됐다. 올해 8월 11일은 고헌 순국 98주기가 되는 날이다.



‘생가 지킴이’에 집필·강연까지



공적이나 부조(浮彫)가 새겨진 ‘메모리얼 가벽’ 설치 공사가 한창이던 지난 21일 오전 북구 송정동의 고헌 생가(박상진길 23)를 찾았다. 생가 대청마루 옆 안방에서 만난 이는 박상진 의사의 증손으로서 생가를 햇수로 13년째 지키고 있는 박중훈 북구문화원 이사 겸 ‘(사)고헌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 학술자문위원. 컴퓨터에 매달려 집필 삼매경에 빠져있던 그를 잠시 돌려 앉혔다.

사실 그는 고헌의 생애라면 손금을 보듯 훤하다. 어릴 적부터 증조모와도 한 집에 살았고 생가 지킴이 역할이 주어진 2007년 이후론 증조부(박상진 의사)에 대한 공부도 누구 못지않게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단순한 ‘생가 지킴이’가 아니다. 저술가, 강사 역도 겸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틈틈이 근대사와 고향 울산과 관련한 집필과 강연 활동에도 열심이다.

그동안 인고의 흔적인 주요 논저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2008) △광복회 100주년기념 자료집 1·2(2014·2015) △ ?풍기광복단의 단명과 1916년 재흥설 검토?(안동사학(6), 2000) △?일제강점기 정인섭의 친일활동과 성격?(역사와 경계, 1989) △?송태관의 삶과 활동?(울산지역문화연구(3), 2015) △?추전 김홍조의 일제강점기 활동과 성격?(울산지역문화연구(5), 2017) 등등 낱낱이 헤아리기가 벅찰 정도.



4살 때 가난 벗어나려 부산으로 이사



박중훈 이사가 태어난 곳은 울산시 북구 송정동. 하지만 네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부산으로 솔가(率家)이사를 하는 바람에 한동안 고향을 등져야 했다. 청소년기와 장년기는 어쩔 수 없이 부산에서 보냈다. 그의 이야기는 잠시 ‘네 살’에 초점을 맞추었다. “증조부는 네 살에 녹동으로 가셨고, 나는 네 살에 부산으로 이사 갔고…”

경주 녹동이라면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고헌이 성장기를 보낸 곳이었고, 모친상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가 일본순사들에게 체포·압송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역사(歷史)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혹자는 고헌이 모친상에 참례하지 않고 독립운동에만 매진했더라면… 하고 가정하기를 즐기기도 한다.

박 이사는 출향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는 웃으면서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는 웃을 수만은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현주소를 훔쳐본 때문일까.

“고향집에서는 저한테 할아버지 항렬(삼종조부·三從祖父)인 박종해 시인의 증조부께서 우리에게 큰집(宗家) 몫으로 물려주신 논 다섯 마지기가 있었지요.(이 시기의 논 한 마지기는 200평. 울산예총 회장을 지낸 박종해 시인은 고헌의 재종질(再從姪) 즉 육촌형제의 아들이다.) 그러나 열 식구가 먹고살기는 너무 힘들었답니다, 논을 처분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합디다.”



경주 최부자 집안 증조모, 가난과 사투



이때 식구 수는 열 손가락을 다 접어야 했다. “증조모님(최영백 여사=고헌의 부인),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우리 5남매…, 요즘 같으면 엄청난 대가족이지요.“

그러나 가난은 독립운동가라고 특별히 봐주는 일이 없었다. KBS는 지난 2월 10일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 208회 <비밀결사의 중심…광복회와 박상진> 편에서 빛바랜 부산일보 사진 한 장을 잠시 화면에 올렸다. 박중훈 이사가 KBS에 제공했다는 이 사진은 증조모 최영백 여사가 양식이 떨어져 한동안 굶은 끝에 생기를 잃고 얼굴마저 부은 채 드러누운 모습을 담았다. (최 여사는 ‘경주 최부잣집’ 가문의 재산가 최 준의 사촌누님이고, 그 때문에 주위에서는 고헌을 ’최부잣집 사위‘로도 불렀다 한다.)

박 이사는 이 점에 주목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던 최부잣집 가문의 귀한 부인이 왜 말년에는 가난으로 쓰러지기까지 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한 기록사냥이 시작됐다. “증조부께서 자신의 재산을 최 준에게 명의신탁한 시기가 1915년경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집안 사이의 갈등은 증조부가 사형 집행으로 돌아가신 1921년 이후에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증조모(최영백 여사)께서 명의신탁 재산을 돌려받겠다고 10년 가까이 네 차례나 송사를 벌였지만 한 번도 승소한 적이 없었습니다.”



고헌, 1921년 8월11일 대구서 최후



2007년 즈음 고향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2007년 8·15 광복절에 때맞춰 고헌 생가가 본디모습으로 복원된다는 소식. 박 이사에게는 증조부를 좀 더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박중훈 이사는 노트를 펼치지 않고도 1918년 이후 증조부의 일대기를 줄줄 외우듯 구술해 나갔다. “1918년 2월 1일 경주 녹동 본가에서 모친 발인 하루 전 일경에 체포-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법 예심 종결-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법 1심에서 사형 선고-1919년 9월 21일 경성 복심법원(현 고등법원) 2심에서 사형 선고- 1920년 3월 1일 경성 고등법원(현 대법원)에서 대구 복심법원을 지정해 일부 파기환송- 1929년 9월 11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 선고-1920년 11월 4일 경성 고등법원에서 사형 확정”

그는 다시 간추려 정리했다. “모친상 때 체포되신 후에 경주경찰서- 대구경찰서-공주경찰서-공주지법 검사국으로 끌려 다니신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주 쪽의 기록은 6·25 한국전쟁 통에 없어졌는지 자료가 많이 빈약한 편입니다. 그리고 공주-경성- 대구… 하는 식으로 법정에 6차례나 나가셨을 겁니다. 끝내 최후를 맞으신 것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였고요.”



‘대한광복회’ 아닌 ‘광복회’가 바른 표현



KBS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정확하게 표현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자나 매체는 ‘대한광복회’란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는 경향이 있다. 박 이사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대한광복회’는 8·15 해방 후에 나온 말입니다. 해방 직후 살아남은 광복회 회원들이 옛 조직에 대한 애착에서 ‘광복회‘란 이름의 정치결사체를 만들었습니다. 학계에서는 1915년 8월에 결성된 광복회와 구분 짓기 위해 1945년 9월 19일에 재건된 광복회를 ’재건광복회‘라고도 부르지요. 이성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의 논문 ?광복회 연구?에도 나와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처음 여기에 함께 했던 ‘한 훈’이란 분이 1945년 10월 광복회를 탈퇴하고 만든 단체가 ‘대한광복단’이었고, 이에 대응해 광복회도 ‘대한광복회’라고 하기 시작했지요.”

박·중·훈. 그의 어깨는 아직도 무겁다.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고헌 박상진 의사 현창 사업’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널리 쓰이는 ‘선양(宣揚)’이란 낱말 대신 ‘현창(顯彰)’이란 낱말을 고집한다. ‘선양’이 일본식 용어라는 이유에서다.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에서 추모(追慕)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앞으로는 추모를 뛰어넘어 현창 사업을 전개할 때도 됐다는 의식이 차츰 싹트고 있다.

친일(親日) 후손과는 달리 독립운동가 집안이 대체로 가난을 달고 산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웃지 못 할 희극이다. 박 이사는 어머니가 시집오셨을 때의 일이라며 들려주신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가 시집오신 지 사흘이 지난 뒤에 부엌으로 들어가시니 증조모님과 조모님이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셨다고 합디다. 알고 보니 밥 지을 쌀이 떨어져서 그러셨다는 겁니다….”



글= 김정주 논설실장, 사진= 장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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